"춘래불사춘"의 유래와 정치인들①
"춘래불사춘"의 유래와 정치인들①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11.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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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연수는 잘 그려진 화폭을 쭉 훑어보고는 입언저리쯤 하여 커다란 점을 하나 찍었다.
궁 안의 모든 백성들은 ‘어머님 같은 왕비님’우러러 칭송하기에 이른다.

중국 전한(前漢)제11대 황제인 원제가 등극한 원년 약2천여 명에 달하는 궁녀가 입궁을 한다. 그들 사이에 왕소군이란 여인이 있었다. 왕소군은 남군(南郡) 자귀(지금의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 쯔구이현)사람으로 이름은 장(嬙), 자는 소군(昭君)이다.

왕소군이 궁녀가 된 사연을 소상하게 알 수는 없으나 당시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어려운 살림살이에 입 하나를 덜려는 궁여지책과 궁녀로 입궁할 시 주어지는 혜택을 누리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여 명이란 궁녀들 속에서 후궁으로의 간택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같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발 벗고 나서는 까닭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출궁과 함께 지금껏 누려왔던 모든 혜택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너무 똑똑해도 신하들은 쉬 피로해진다. 이를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자와 술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피로에 지친 황제가 짬을 내어 쉬려해도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매일 저녁이면 환관들은 갖가지의 방법을 동원하여 치장을 마친 궁녀들을 줄줄이 선보이는 것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황제도 자신을 위해 미소 짓는 그녀들의 헤픈 웃음을 즐겼다.

달포가 지날 쯤 하여 간택된 자의 기쁨과 탈락한 자의 한숨이 난무하는 현장이 싫어지기 시작할 즈음 환관들은 또 다른 묘안을 내 놓았다. 그 방법이란 것이 모든 궁녀들을 그림으로 그려는 것 이었다. 그 직책으로 모연수란 궁중화가가 선임되었다.

황제로부터 지목된 모연수란 궁중화가는 대단한 자리라도 꿰찬 듯 기뻐하며 열심히 일하리라 초심을 다잡았다. 그의 초심대로 처음 얼마간은 모연수도 궁녀도 별 거래 없이 벽계수가 흐르는 듯 지났다. 그러 던 어느 날 모연수를 찾은 궁녀 하나가 은근슬쩍 거래를 제안했다. 제아무리 미녀라 할지라도 흠은 있는 것이었다. 이를 돈 몇 푼으로 산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성형수술의 일종이다. 둘은 은밀히 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어서 소문은 시시각각으로 퍼져 오는 궁녀마다 돈 몇 푼으로 미인도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아 모연수의 생활은 날로 윤택해졌다.

그 와중에 숙맥처럼 빈손으로 찾아든 궁녀가 있어 왕소군이었다. 기실 그녀는 가난이 찌들어 무일푼이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든 때와는 달리 쌀알이 입안에서 설 때나, 젓가락으로 밥알을 헤아릴 때나, 소나기밥으로 주린 배를 채울 때나 궁으로 들어오고 부터는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행복한 그녀였고 그 와중에 가끔 엽전 푼 이나 생겼지만 제 앞가림보다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서 몽땅 집으로 보낸 터였다. 그러다 보니 의자에 앉아 마냥 쭈뼛거리는 그녀다.

내막을 모르는 채 아무리 기다려도 나올 것이 나오질 않자 모연수는 잘 그려진 화폭을 쭉 훑어보고는 입언저리 쯤 하여 커다란 점을 하나 찍었다. 당연히 그 초상화는 가장 밑으로 들어갔고 왕소군의 빼어난 미색도 돼지우리에 던져진 옥이 되었다.

그즈음 흉노의 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와 혼인을 요구하며 화친을 청하였다. 이때 원제는 초상화 중 가장 못 생긴 왕소군을 지목하여 응하였다. 이윽고 단장을 마친 왕소군이 대전에 들자 원제는 눈을 의심하였다. 지금껏 본 여인 중에 미모로 치자면 단연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번 정해진 국혼을 파할 수는 없었다. 천하절색의 미인을 놓쳐버린 원제의 쓰린 마음을 뒤로 화번공주가 된 왕소군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을 따라 흉노로 떠나자 노여움은 용암이 끓어오르듯 폭발했다. 즉시 모연수를 잡아들여 처형을 명한 원제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북으로 갈수로 날씨는 매서웠다. 어느 강변에서 말 잔등을 의지하여 잠시 쉬는 동안 왕소군은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여 비파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서산을 넘는 태양은 마지막 남은 빛을 대지 위에 오롯이 내려놓고 왕소군의 끊이지 않는 눈물은 오지랖을 흥건히 적셨다. 이 모습을 날아가던 기러기가 넋을 잃고 바라다보다 떨어진다. 후세 사람들의 이날의 사연을 기려 왕소군에게 낙안(落雁)이란 별칭을 주었다.

이후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은 영호알씨((흉노의 안녕을 비는 비(妃)라는 뜻이라고 하며, 여기서 ‘알씨’는 군주의 비(妃)를 뜻한다.))로 봉해 진다. 왕소군이 중국 4대 미인에 들 만큼 빼어난 미모만 거들먹거렸다면 그저 얼굴만 예쁜 평범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왕비가 된 왕소군은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부터 교육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위계에 의한 압력, 즉 왕비라는 직책으로 억압한다는 등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때마다 사랑과 포용으로 그들을 대하였다. 지독히도 인내를 요구하는 지난한 시간이 지나자 시녀들 또한 사람인지라 그녀의 진심을 알고는 진실로 따르기 시작했고 배우고자 노력했다. 수저의 사용방법을 배우고, 바느질을 배우고, 길쌈을 배우고, 예의범절을 배웠다. 특히 남녀 간의 예를 배운 그녀들은 과거의 덜렁거리는 삶에서 요조숙녀로 변하는 등 확연히 달라졌다. 이에 점차로 따르는 시녀들이 늘어났으며 얼마 안가서 궁 안의 모든 백성들은 ‘어머님 같은 왕비님’ 우러러 칭송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을 막 지나 세찬 바람결에 싱그러운 풀냄새가 묻어와 초원을 휘감을 때였다. 하늘은 맑고 햇살이 궁궐 가득하여 팽창할 때 “마마님 봄이 왔어요! 봄 놀이가요!”시녀들이 손을 이끌었다.

궁을 나서자 따뜻한 바람이 솜털이 되어 얼굴에 닿았다. 깊은 숨을 몰아쉬며 하늘은 올려다보자 독수리 몇 마리가 타원형을 그리며 돌고 있다. 눈이 녹아 드러난 죽은 시체를 찾는 모양이었다. 한결 숨이 죽은 바람이지만 여전히 소매 끝을 파고들어 매서웠다. 옷깃을 바짝 여미고 돌아보는 초원은 여전히 황량하다. 말들이 달리자 꽁무니를 따라서 싯누런 흙먼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박질이다. 꽃도 없고 풀도 없는 들판, 남들은 모두 봄이라 좋아하지만 왕소군의 눈에는 봄이 봄 같지가 않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궁을 택했다. 요행히 황제의 눈에 들어 후궁첨지를 받는다면 자신에게는 광영이자 가문의 영광이라 여겨 어려운 날들은 기쁨으로 지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왕소군은 오랑캐 땅으로 시집오기 전 삼일 동안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었다. 비록 돈은 바치지 못했지만 모연수가 그려준 초상화가 빛을 발한 것이라 생각했다. 후궁의 첨지를 받고 어느 정도 재물이 생기면 사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고민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