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억새꽃과 갈대꽃
(36) 억새꽃과 갈대꽃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11.25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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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공기를 마시면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오염된 말을 먹고 마시면 불행의 나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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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0일 창녕 화왕산에 올랐습니다. 산행을 통한 심신단련이 주축이었으나, 화왕산성, 억새꽃, 창녕 조씨 득성 유래 연못, 이 세 가지를 확인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자하곡(紫霞谷) 입구에 주차해 놓고 아스팔트길을 한참 올라 도성암(道成庵) 앞 약수를 한 잔 마신 다음 제3등산로에 들어섰습니다. 올라보니 제3등산로는 음악의 소나타 형식처럼 A-B-A로 되어있었습니다. A는 돌이 적고 다소 평탄한 길이고, B는 돌과 바위가 많은 가파른 길이므로 이렇게 설명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해발 757m 화왕산 정상에 서니, 남쪽으로 화왕산성이 보이고, 왼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쭉하게 역삼각형을 이룬 분화구에 억새 군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억새꽃의 은빛 향연은 이미 시들했으나, 분화구 바닥에 정사각형으로 석축을 둘러놓은 용지(龍池)가 보였습니다.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애써 정사각형 석축을 쌓아놓아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홍의(紅衣)를 펄럭이며 나라를 지킨 곽제우 장군이 의병들의 요새로 삼았던 화왕산성은 굳건하게 역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이 모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義)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그 정신을 가슴 깊이 새겨가기를 기원했습니다.

억새꽃은 억새풀이 선물하는 가을의 전령사입니다. 은빛 물결이 바람에 흔들린다 해서 ‘바람을 노래하는 억새’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억새는 주로 산이나 언덕에 자라고 키가 1.2m 정도입니다. 흔히 억새를 갈대라고 합니다. 갈대는 강변이나 습지에 잘 자라며 키가 2m 이상 되기도 합니다. 갈대꽃(蘆花)은 고동색(古銅色), 즉 어두운 갈색 꽃이므로 은빛 억새꽃과 구별됩니다. 창녕군에서도 ‘화왕산 갈대축제’ 라고 하다가 ‘억새축제’로 수정했다고 합니다.

갈대와 억새를 혼동하는 것은 특정 식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전문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으나, 언어의 자의성(自意性)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사화과 꽃무릇의 혼동도 이와 같습니다. 상사화는 초봄에 가장 먼저 엄지손가락처럼 새싹이 나와서 20-30cm 정도 자라다가 6월초 모두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9월 중,하순에 꽃대가 올라와서 연분홍 꽃이 고고하게 핍니다. 꽃이 지면 땅속의 알뿌리로 월동합니다. 꽃무릇은 10월 초,중순에 꽃대가 올라와서 진홍색 화사한 꽃이 피고 지면, 부추 비슷한 잎이 돋아나서 월동합니다. 그 잎사귀도 6월초에 모두 죽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상사화와 꽃무릇의 생태는 다르지만 잎사귀를 만나지 못하고 꽃이 피는 모습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무릇도 상사화라고 합니다. 갈대와 억새, 상사화와 꽃무릇과 같은 혼동은 언어의 자의성에서 비롯됩니다. 언어의 자의성은 같은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젖먹이들이 ‘찌찌’ ‘맘마’라고 하다가 점차 어른들이 쓰는 말로 수정해 갑니다. 심신의 발달과 함께 언어에는 사회성,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억새꽃을 갈대꽃이라고 해도, 상사화와 꽃무릇을 혼동해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유, 평등, 민주와 같은 추상명사의 경우는 다릅니다. 특히 연애와 결혼에서 보면, 사랑한다고 해 놓고 데이트 폭력을 일삼고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을 혼동하여 사랑하므로 너를 때려도 된다고 자가당착이기 때문에 불행이 심화됩니다. 언어의 자의성이라는 기묘한 현상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가두어 가면서 무간지옥에 빠지고 맙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고 하이데거가 선언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언어의 굴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염된 공기를 마시면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오염된 말을 먹고 마시면 불행의 나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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