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35)
녹슨 철모 (35)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11.2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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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는 서양 군인들과 한국 군인들이 뒤섞여 다닌다. 매일 이렇게 만나다 보니 그들은 이제 태원의 동네 아저씨이며 삼촌들이 되었다. 서양 군인들 출입이 잦다 보니 동네에는 ‘양갈보’ 집도 몇 군데 있었다. 어떤 집 벽에는 영어가 페인트로 쓰여져 있었는데 대개가 일본 적산 집들인 동네에 서양 글자가 써 있는 것이 무척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동네 애들은 모든 세상이 원래 다 그런 것인 줄 알고 살았다.

8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서양 C-레이션의 향기로운 과자와 맛있는 깡통 음식이 일본 다다미방에서 태어난 태원의 간식이었다. 유니세프(UNICEF)에서는 학교를 통해 애들 굶어 죽지 말라고 우유 가루를 자주 나눠주었다. 외국에서 보내온 것이라며 옷이나 장난감도 주었다. 

애들은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런 풍성하고 아름다운 음식을 만드는 나라는 분명 천당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주 나쁜 놈들이 사는 나라이고 미국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그렇게 애들 생각이 각인되어 있었다. 태원은 일본 집에 살면서도 그것이 우리식 집인 줄 알았다. 그의 아버지도 입으로는 일본사람 욕을 하면서도 대화 속에는 일본어를 많이 쓰고 일본정신을 그의 아들들에게 가르쳤다. 피는 한국 피인데 음식은 우리식이며 간식은 미국식, 그리고 일본식 집에서 사는 것이 당시 시내 부잣집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태원이 주둔하고 있는 기지촌의 분위기가 바로 어릴 때 그가 살던 동네 이웃의 피란민 촌과 ‘양갈보 집’들과 거의 흡사하였다. 방 안에는 침대가 있고 지붕은 기름 먹인 검은 종이로 만든 소위 '루핑' 집이다. 간판은 거의 영어로 되어 있다. 최근 한국군이 들어오면서 좀 한국화되고 있지만 한꺼번에 바뀌지는 못하고 또 아직 계속 주둔하는 미군도 있으므로 전체가 바뀔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 바뀌어가는 한·미 짬뽕식 분위기는 바로 한국전이 끝나고 미군이 철수할 때 대구의 그 분위기와 거의 같았다. 태원은 잃어버린 고향의 한 조각을 여기에서 느끼고 있었다. 

도랑 건너에는 미군 부대가 있고 그 동네 술집은 으레 미군 전용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으로서는 많은 미군이 철수한 뒤 돈벌이가 신통치 않아 국적에 관계 없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그 동네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 맥주를 아주 싼 값으로 판다고 소문이 나 있어 어느 날 태원은 동료 장교 몇을 데리고 그 중의 어느 한 술집을 찾아갔다. 술집 안은 컴컴하고 붉은 조명으로 되어 있었다. 앰프에선 블루스가 흐느적거리며 흘러나오는데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졸고 있던 주인이 매우 좋아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귀하게 방문한 동족인 데다 손님이 없던 터라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태원 일행은 잘되었다는 심정으로 정말 싼 맥주를 마음껏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느긋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자기 술집 문을 발로 차며 들어오는 흑인 미군 병사가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미군은 이미 술에 몹시 취해 있었는데 손에는 소주병을 쥐고 있었다. 그는 병나발을 불며 비틀거리며 지나가다가 태원네 중 한 사람과 부딪쳤다. 녀석이 “아임 소리” 하며 지나갔다. 술 취한 사람에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일행 중 한 사람이 미국식 예절을 지킨다고 “돈 멘션 이트”라고 대답을 하였다. 지나가던 미군이 이 무슨 소린가 하고 뒤를 돌아보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며 다시 되돌아 걸어왔다. 다음부터 일이 복잡하게 꼬여갔다. 녀석이 예의를 무시하고 일행의 자리에 끼어 앉았다. 안 그래도 알아듣기 힘든 말을, 술 취해 혀 꼬인 소리를 하니 무슨 소리인지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중에 한마디가 “아이 해브 닥상 트러블"이란다. 이 말은 일행이 유일하게 알아듣기 쉬운 문장이었는데 불행히 "닥상” 이라는 단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무슨 카탈로그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는데 그것을 사라는 것인지 도둑을 맞았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주인을 불러 통역을 부탁했다.

“이 녀석은 양갈보와 살다가 오늘 그년이 지금 보여주는 이 그림의 가재도구를 갖고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야. 그래서 그는 의정부 쪽으로 그년을 찾아다니다가 못 찾고 그냥 오는 길이라는군.” 

주인이 알아듣게 해석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닥상이란 무슨 말이요?" 

일행이 묻자 주인은 귀찮다는 듯이 설명해주었다.

"그거 일본말이에요. 많다는 뜻이잖아요. 지가 오늘 이런 물건들을 도둑맞고 나니 고민이 많다는 이야기죠.” 

이어 해설까지 덧붙였다.

“이 녀석들은 일본에서 근무하다 온 사람이 많아 제 딴엔 우리가 알아듣기 쉬우라고 일본어를 섞어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놈들은 우리가 아직 일본말을 함께 쓰는 줄 알고 있나 봐.” 

뜻은 대강 통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모르고 계속 횡설수설 지껄이고 있는 것이 큰 문제였다. 만약 몸싸움이라도 일어나 미군 사병에게 한국군 장교가 맞았다면 큰 창피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다시 문이 급하게 열리면서 백인 사병이 하나 들어왔다. 그는 깍듯하게 태원 일행에게 거수 경례를 한 다음 앉아 있는 그의 동료에게 뭐라고 설득하였고 술 취한 사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싫다는 표정을 하였다. 

아마 이 녀석이 귀대 시간을 어긴 모양이다. 그래서 그 동료들이 그가 자주 가는 부대 인근 술집으로 찾아온 것 같았다. 태원 일행은 이들의 돌아가는 모습을 흥미있게 보고 있었다. 놈은 좀처럼 갈 생각을 않고 큰 소리로 뭐라고 떠들다가 '쾅' 하고 소주병을 탁자에 내리쳐 부수었다. 분위기가 한바탕 소동을 부리기 직전으로 가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소위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지게' 생겼다. 

태원 일행이 그냥 나오려 하니 놈이 시비를 걸 것 같았고 앉아 있자니 놈이 계속 뭐라고 떠들며 흥분하고 있으니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백인 미군 사병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못하고 나가 버렸다. 이제 태원 일행의 처지는 더욱 난감해졌다. 바람막이가 없어진 탓이었다. 술 취한 녀석은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데 생각 같아서는 한꺼번에 덤벼들어 놈을 쓰러뜨려 두들겨 패주고 나오고 싶었지만 그러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함께 보니 미군 상사 하나가 문에 떡 버티고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 상사가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자 그 흑인 병사는 두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미군들은 영화에서 보면 군기가 빠지고 상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런 광경을 보자 태원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 사람들이 사석에서는 상하를 떠나 행동을 하니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일과 중에는 철저한 군기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한국군 장교를 보면 깍듯하게 경례를 하곤 했다. 그들은 사복을 하고 외출하여도 경례를 하였다. 심지어 사복을 하고 양손에 물건을 든 미군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광경도 보았다. 

영화에서는 미군들이 대포를 쏘다가도 커피를 끓여 마시거나 전쟁 중에도 계집애들 사진이나 붙여놓고 하모니카나 부는 군인들이라 군기가 빠져도 많이 빠진 군인으로 보였는데 그것은 습관과 풍습의 차이지 그들의 허약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들은 잠깐 훈련을 나가도 마치 거기서 몇 년 동안 살 것처럼 주위를 꾸몄다. 우리는 몇 달씩 주둔하더라도 그곳이 살 곳이 아니면 절대로 주변을 정리하지 않는데 말이다. 미군은 훈련이나 심지어 전쟁마저도 즐기는 사람들이다. 

미군은 훈련이나 비상시에도 보면 철저하게 규정을 지켰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도 철저하게 즐겼다. 이들의 즐기는 모습만 눈에 띄어 세상에는 독일 병정이 가장 군기가 세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은 전쟁할 때마다 패했다. 독일군은 늘 긴장해서 살고 있는 탓에 보기에는 굉장히 센 군대 같지만 그 긴장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단기전에는 독일군이 승리를 할 수 있겠지만 몇 년씩 걸리는 대전에서는 반드시 지고 마는 것이다. 즐기며 싸우는 미국이 장기전에서 반드시 이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주정뱅이 사병이 가고 나서 모두 넋 나간 듯이 앉아 있자니까 주인이 설명해주었다.

“양놈들이 말이요. 술이나 계집애를 좋아하고 군기가 없는 놈들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아요. 아까 봤지요. 술 취한 놈이 무단이탈하여 술집에 있자, 인사계가 먼저 고참을 보냈고, 말을 듣지 않자 본인이 직접 온 거예요. 저런 경우 어떤 병사도 인사계 명령에 불복하는 놈은 보지 못했어요.”

만약 우리 같은 경우였다면 저렇게 인사계가 직접 오지도 않겠거니와 잘못하다간 동료들이 무장을 하고 잡으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군은 절대로 두들겨 패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런 군기가 확립된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