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⑮무댕기 단과 바가리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⑮무댕기 단과 바가리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11.22 12: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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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의 기쁨으로 고된 줄 몰랐던 벼 베기
즐비하게 늘어선 바가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절기는 매년 10월 24일 경이다. 이 무렵이면 햇살은 남쪽 하늘에 누워 처마 밑을 지나 방바닥 깊숙이 들어오고 어래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찼다. 소평마을은 들판 가운데 있어서 바람은 거침없이 내달리고, 눈이나 서리가 내리면 사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먹었다는 만나가 내린 듯 하얬다. 1968년에는 입동(11월 7일)을 스무날 가량이나 앞둔 10월 19일에 서리가 내렸다. 채소밭 싸리나무 울타리를 타고 오르던 호박넝쿨은 풀이 죽었고 붉게 물들어가던 감나무 잎은 우수수 떨어졌다. 채소밭을 채전(菜田) 밭'이라고 했다. ‘역전(驛前) 앞'처럼 곶감 접말 하기의 사례라 하겠다.

서리가 두어 번 내리고 나면 그 동안 채독(菜毒)이 겁나서 못 먹던 무나 배추도 무생채와 배추쌈으로 먹을 수 있었다. 무를 뽑아 무청으로 겉에 묻은 흙을 쓱쓱 닦고 나서, 손톱으로 켜를 따라 돌려서 껍질을 벗겨내면 먹음직스런 속살이 드러났다. 주위에 과수원이 없으니 과일도 먹기 어렵고 간식도 귀한 시절이라 무를 자주 먹었는데 먹고 나면 트림이 자주 나는 게 흠이었다. 특히 왜무'의 흙 위로 올라와서 무청과 맞닿은, 녹색을 띤 부위가 맛있었다. ‘조선무'는 흙 위로 올라와 있는 부분이 거의 없고, 무를 뽑아서 손톱으로 껍질이 벗기려고 해도 벗겨지지 않고, 낫으로 깎더라도 매워서 먹을 수 없었다. 김장용으로는 왜무보다 조선무를 더 많이 썼다.

서리 맞은 벼는 윤기를 잃었고 고개 숙인 벼이삭의 낟알은 쉽게 떨어졌다. 피사리를 제대로 안 한 논의 피는 이미 열매를 모두 떨어뜨리고 농부를 조롱하듯 꼿꼿이 서서 건들거렸다. 이렇게 낟알이 떨어지는 것을 얼거진다'라고 했다. 10월 중순부터는 다시 농번기로 접어들고 학교는 일손을 도우라고 사흘 정도 가정실습을 했다. 베 베기는 모내기만큼 품앗이가 절실하지 않아 식구들끼리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리가 내린 날 낮은 따뜻했다.

소평마을 사람들에게 벼 베기 도구는 오로지 낫 놓고 기역 자의 낫뿐이었다. 옛날에는 대장장이가 두드려서 만든 조선낫' 일색이었으나 차츰 강철판을 잘라서 만든 양태낫'이 그 자리를 밀어냈다. 조선낫은 나무 가지치기나 다듬기에 적합했고 양태낫은 가벼워서 풀이나 벼, 보리를 베어 낼 때 편리했다. 식전에 아버지는 낫 여러 자루를 숫돌에 갈아서 바지게에 담았다. 낫이 잘 갈렸는지 아닌지는 엄지손가락 안쪽으로 칼날을 횡으로 살살 긁어보면 알 수 있었다. 까끌까끌하면 날이 선 것이다. 어머니는 새참으로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서 논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에 대동공업에서 콤바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부터다.

마을 동쪽 들판, 우측으로 양동산 북쪽 부분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마을 동쪽 들판, 우측으로 양동산 북쪽 부분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장정(壯丁)은 왼손 엄지손가락을 위로 가도록 손을 벌려 벼 네 포기의 허리 부분을 한꺼번에 잡고 낫을 든 오른손으로 잡아 당겼다. 그러면 세 포기가 한꺼번에 드드득소리를 내며 잘려나갔다. 물론 맘먹고 낫을 돌리면 네 포기를 자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속도가 느렸다. 소리만 들어도 어떻게 베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손아귀가 작아서 두 포기를 잡고 드득베고, 어른은 보통 네 포기를 잡고 두 번 낫질로 드득, 드득벴다.

일등 농부는 벼 포기를 잘라서는 왼팔에 걸쳤다. 그리고 다시 네 포기를 베어서 한꺼번에 추슬렀다이때 벼이삭이 출렁거리는 모습은 긴 머리 소녀가 고개를 돌릴 때 일렁거리던 머릿결을 연상시켰다오른손에 든 낫으로는 벼의 뿌리 쪽을 눌러 중심을 잡았다. 대팻밥모자 쓴 농부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화보에 등장하는 모습도 주로 이 장면이었다.

벤 벼를 놓을 곳은 베기 전에 미리 끈으로 만들었다. 벼 두 포기를 베어서 이삭을 서로 마주보게 포갠 후 닭 모가지 틀 듯 비틀어 논바닥에 놓으면 볏단을 묶을 끈이 됐다. 그 위에 벼를 베어서 세 아름 정도 포개어 놓고 끈의 양쪽을 들어 올려, 어긋맞게 해서, 비틀어, 그 끝을 벼와 끈 사이에 밀어 넣으면 볏단이 완성 됐다. 이 볏단을 무댕기 단이라고 했다. 이는 물기가 있는 끈으로 묶은 단이라는 뜻이다.

무댕기 단으로 묶는 것은 논바닥이 질퍽거리거나 논을 빨리 비워내야 할 때 쓰는 방법으로, 서둘러 베 내고 논이 말라야 제 때 보리나 밀을 갈 수 있었다논에 골을 타고 보리 씨 뿌리는 것을 보리 갈다라고 했다. 만약 보리 갈 일이 없고 바닥이 말라있으면 무댕기 단으로 묶지 않고 베는 대로 그냥 바닥에 나란히 깔면 됐다. 얇게 나란히 너는 것을 날라리 널다'라고 했다.

고래전' 논은 배수가 잘 안 되는 검은 진흙 토질로 벼를 벨 때면 맨발로 다리를 둥둥 걷고 들어가서 베고, 무댕기 단도 세워 놓아야 했다. 우리는 햇볕에 검게 탄 사람을 보면 고래전 말띠기(말뚝) 같다고 놀리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날만 새면 들판으로 나가서 어둑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가 온종일 논에 엎드려 있어도 논 서 마지기를 비워내려면 이틀을 잡아야했다.

해가 서산에 한 발 정도 남았을 때면 학교 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커다란 구원병이었다. 부모가 베어 놓은 무댕기 단을 논둑으로 갖다 날랐다. 어린 아이는 한 단 또는 양손에 한 단씩 들어 나르고, 힘 센 아이는 양쪽 허리에 한 단씩 끼고 양 손으로 또 한 단 씩 들어 한꺼번에 넉 단을 날랐다. 그러다가 나중에 힘에 부치면 오른쪽은 손으로만 한 단을 들었다.

어둑해지면 벼 베기를 마친 어머니는 먼저 저녁밥을 지으러 집으로 향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볏단을 마저 나른 후 바가리를 쳤다. 무댕기 단을 논둑을 따라 길게 쌓는 일을 바가리 친다라고 하고 그렇게 잇대어 쟁인 볏단을 바가리라고 했다. 논둑은 항상 아래 둑이 자기 몫이었다. 모내기를 앞두고 논둑 할 때도 그랬고 바가리 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지주(地主)는 벼를 베어서 무댕기 단을 두 단씩 짝 지어 놓았다가, 그 중 하나는 주인 몫 다른 하나는 소작농 몫으로 바가리를 따로 치고, 타작도 따로 하기를 원했다. 소작농으로서는 번거롭기 짝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작해서 반반으로 나누면 간단하련만 아마 논의 토질이 부분적으로 다르거나, 거름더미가 있었던 자리와 없었던 자리, 논이 평평하지 않아 물 공급 부족 등에 따른 작황의 차이를 없애려고 그랬던 것 같다. 당시 소작료는 모든 농비(農費)를 소작농이 부담하고 탈곡물의 50%를 가마니에 넣어 주는 조건이었다.

필자의 여동생 재화와 어머니의 우측으로 바가리가 보이고 그 뒤로 어래산이 펼쳐져 있다. 정재용 기자
필자의 여동생 재화와 어머니의 우측으로 바가리가 보이고 그 뒤로 어래산이 펼쳐져 있다. 정재용 기자

논바닥이 어느 정도 말라서 꾸들꾸들해지면 보리갈이 차례였다. 보리갈이는 마당에 있던 거름과 잿간에 있던 재를 논으로 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소가 있는 집은 소달구지나 옹구를 이용하고 없는 집은 지게로 져다 날랐다. 1960년대 중반부터 점차 마을에 리어카(rear car, 손수레)가 들어오면서 소의 역할을 대신했다. 훌치(쟁기)로 골을 타고, 삼태기로 논 한 쪽에 쌓아 놓았던 거름을 날라다가 골에 뿌리고 나서 그 위에 씨를 뿌렸다. 그리고 끄징개(끌개)를 끌어서 흙을 덮은 뒤에, 곰배(곰방메)로 흙을 잘게 부수거나 골에 흙이 많이 들어가 있으면 쳐 내서 마무리를 했다.

그 사이에 볏단은 햇살과 바람에 건조되어 타작될 날짜를 기다렸다. 이 때를 놓칠세라 참새는 떼로 몰려다니고 들쥐는 논둑에 굴을 파고 그 속으로 부지런히 벼이삭을 물어다 날랐다. 거기다가 볏단이 이불 역할까지 해 주니 들쥐로서는 낙원에 들어 온 기분이었을 터였다. 벼 베기가 늦어지거나 보리갈이로 타작이 늦어지면 북서풍을 타고 청둥오리나 기러기가 날아와서 바가리 위에 무더기로 앉아 벼이삭을 훑어 먹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타작하기에 앞서 한 차례 일렬종대로 있던 바가리를 뒤로 돌아' 형식으로 돌려서 새로 쳤다. 볏단을 말릴 요령이었다. 이것을 바가리 뒤집는다'라고 했다.

이 즈음이면 간간이 무서리 대신 된서리가 내리고 교실의 칠판 한쪽에는 ‘낙수(落穗) 수집이라는 전달사항이 빠지지 않았다. 학생들로 하여금 벼이삭을 주워서 그 돈으로 도서실의 도서를 확충한다는 명목이었는데 아이들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그 시간에 집안일을 돕고 타작한 알곡을 퍼다 냈다. 그때는 도서관'이라 하지 않고 도서실'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