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에이지 골든라이프] 라오스 입성 5년... 헐크 이만수의 신화는 계속된다
[골든에이지 골든라이프] 라오스 입성 5년... 헐크 이만수의 신화는 계속된다
  • 류영길 기자
  • 승인 2019.11.20 23:28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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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여섯 번 변해도 이만수 감독의 얼굴엔 미소가 여전하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구름관중도 없고 연봉도 없는 지금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만수 감독.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새 비전을 품다

어느 가을날 저녁, 인천의 한 고즈넉한 레스토랑에 중년의 두 남녀가 나타났다. 남자는 탄탄한 몸매의 후덕스럽게 생긴 사나이였고 여자는 지적이면서도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 같아 보였다.

둘이 다정하게 차를 마시던 중, 남자가 수줍은 듯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여보,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지? 내가 당신을 위해 멋진 계획을 했어. 자, 여기.” 남자는 여자에게 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거기엔 해외항공권과 호텔 예약권이 들어있었다. “이게 뭐예요?” “응, 당신 고생했다고 내가 보름간 동유럽여행을 준비했어. 우리 이제 힘들었던 것 다 잊고 좀 즐기면서 살아요.”

기뻐해야 할 여자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평소 함께 웃고 함께 눈물 흘리며 따스한 위로의 말과 포근한 미소를 보내주던 얼굴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은 리더로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세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여자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남자는 놀란 듯이 받아쳤다. “당신은 감독생활 끝나면 라오스로 재능기부 간다고 공언했었잖아요? 그걸 벌써 잊었나요?”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대꾸도 없이 봉투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엔 새로운 비전을 향한 결기가 번져갔다.

2014년 11월 12일, 대한민국 야구의 전설 이만수는 SK와이번스의 감독을 내려놓은 지 열흘 만에 라오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5년 전의 일이다.

사실 그도 야구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피 말리는 승부의 세계에서 지칠 대로 지쳤으니 야구란 족쇄에서 이제 해방되고 싶었던 게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인생은 야구로부터 점점 멀어져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인 이신화 여사는 그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단절될 뻔했던 한 스타의 역사가 깨어있는 아내 덕택에 다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실로 아내의 그 한마디는 그의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스타 이만수의 인생3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모지에 틔운 야구의 싹

야구로 받은 사랑, 야구로 갚겠다는 이만수 감독. 그는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낮은 데로 향했다. 번 돈 가지고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삶은 일찍이 포기했다. 그는 1인당 GDP세계 137위인 라오스로 달려갔다.

라오스는 야구라는 단어조차 없는 야구 불모지였다. 마실 물도, 먹을 빵도 모자라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가난한 백성에게 야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스포츠였다. 물이 귀한 나라 굶주린 아이들에게 “야구하고 싶은 사람은 오너라. 물과 빵을 줄게” 했더니 500명이 모여 들었다.

운동장 5바퀴를 돌려 반으로 줄이고, 100m 달리기와 50m 달리기를 통해 재차 반씩 줄였다. 그리고 마지막 캐치볼 테스트를 통과한 40명으로 라오스 최초의 야구팀을 만들었다. 이것이 ‘라오J브라더스’팀이다.

라오스 최초의 야구팀 라오J브라더스 아이들에게 첫 수업을 하고 있는 이만수 감독. 이들이 입고 있는 각양각색의 유니폼은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이 입던 것들이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라오스 최초의 야구팀 라오J브라더스 아이들에게 첫 수업을 하고 있는 이만수 감독. 이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은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이 입었던 것들을 세탁한 것이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이만수팀=유일팀=국가대표팀

이 감독이 이끄는 ‘라오J브라더스’는 라오스 유일의 야구팀이요 국가대표팀이 되었다. 말이 국가대표팀이지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수준이었다. 그러나 라오J브라더스의 실력은 놀랍도록 빠르게 성장했다. 창단 4년을 맞은 지난해 8월엔 라오J브라더스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도 했다. 야구 역사 30년인 스리랑카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11대12라는 대등한 경기를 펼쳐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팀의 전력이 안정적이진 못했다. 얼마 전엔 4년 정도 몸담았던 에이스가 생업으로 생계 현장에 나서면서 전력 공백이 생겼다. 그렇지만 이 감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지만 그래도 콩나물처럼 잘 커가고 있다”고 미소 지었다.

최초의 야구장 건립

라오스에 야구팀은 생겼지만 야구장이 없었다. 선수들은 축구장을 전전하며 야구를 배워야만 했다. 지난 1월, 라오스에서 개최된 한국, 라오스, 베트남, 일본 등지의 사회인 야구 10개팀 초청 제5회 라오스 교육부장관배 국제야구대회도 야구장이 아닌 축구장에서 열렸다.

야구장 없는 야구선수들이었지만 묵묵히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준 라오스 청소년들에게 이 감독은 약속했다. 야구 규칙을 몸으로 익힐 수 있는 국제규격 야구장을 지어주겠노라고.

그가 이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라오스 정부는 이 감독의 진심에 감동하여 부지 약 6만9000m²(약 2만1000평)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렇지만 6억원에 달하는 건설비용이 문제였다. 1년 4개월 동안 뛰어다니며 고국의 정부에 손을 벌렸다. 이렇다 할 결실이 없었다. 다행히도 DGB금융그룹(대구은행)에서 3억 원을 내주었다. 나머지 3억 원은 이 감독의 사재와 개인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야구장
라오스 정부가 제공한 땅. 직접 갈고리로 땅을 고르고 있는 이만수 감독. 펜스 설치 중 잠시 휴식. 12월이면 라오스 최초의 야구장이 준공된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올해 4월 드디어 야구장 건설 공사의 첫 삽을 떴다. 인구 700만 명의 나라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첫 야구장 건설의 고동이 울려 퍼졌다. 우기에 중단되었던 야구장 건설 공사가 10월부터 재개되었다. 드디어 다음 달이면 대망의 라오스 첫 야구장 준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높은 관중석과 커다란 전광판, 대낮같은 조명시설이 갖추어진 호화로운 야구장은 아니지만 라오스 최초의 야구장이 완공된다는 기대와 설렘이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꿈이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라곤 정말 몰랐습니다. 상상만 했던 일들이 이렇게 현실로 다가와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감독은 메이저리그 우승을 눈앞에 둔 것보다 더 흥분하고 있다.

야구를 통한 인재 양성

지난 추석, 이 감독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라오J브라더스에서 뛰고 있는 버이 선수가 동덕국립대학교 영문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라오스 동덕국립대학교는 우리나라의 서울대학교와 같은 대학이다.

버이 외에도 야구단에 속해 있는 고등학교 졸업생 7명이 모두 이번에 동덕국립대학교에 합격했다. 특히 버이는 올해부터 라오J브라더스 현지지도자로 세워 연수 시키고 있는 선수다. 이들로 인해 라오J브라더스는 공부하며 야구하는 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야구가 좋아서 야구에 뛰어든 라오스 아이들. 이들 중 대부분은 나이가 차면 야구를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로야구나 실업야구가 없는 라오스인지라 야구가 생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야구에서 배운 협동과 희생정신이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도 이 감독과 헐크파운데이션은 이들에게 정성을 쏟아붓고 있다.

지금까지 라오J브라더스팀을 거쳐간 250여 명의 선수들이 각계각층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어 이 감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그는 라오스 청소년들에게도 야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고 있다. 우리나라도 야구가 도입된 초창기에는 그 누구도 야구가 직업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했으니 말이다.

라오스 최고의 대학에 수석입학한 버이 선수(오른쪽) 와 비 선수.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라오스 최고의 대학에 수석입학한 버이 선수(오른쪽) 와 비 선수.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외교관으로서의 이만수

“일단 한국 밖으로 나가면 나 한 사람이 곧 KOREA라는 생각을 했었죠. 이런 자세로 메이저리그 생활과 라오스 봉사를 했습니다.” 야구인으로서 한 사람의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는 이만수 감독은 자신이 하는 일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처음 라오스에 들어갔을 땐 사회주의 국가 라오스의 공무원들이 이 감독을 경계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나 의심도 하고 어떤 일을 처리해 줄 때 바라는 것도 많았다. 그렇지만 이 감독은 한결같이 라오스 청소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재능기부가 개인의 선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라오스의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오스 하늘에 펄럭이는 태극기.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라오스 하늘에 펄럭이는 태극기.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낯선 아이들을 안아주고 함께 뒹굴며 함성으로 격려했다. 두려워하던 아이들이 마음씨 좋고 털털한 아저씨 이만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야구 영웅 이만수를 존경하던 아이들이 급기야 이만수의 나라 대한민국을 동경하게 되었다.

라오스에 야구한류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라오스의 청소년들은 이만수 감독의 고국 대한민국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다.

2016년 8월, 드디어 이만수의 아이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아이들은 그들 야구의 어머니 나라 대한민국을 찾아왔다.

2016년, 한국을 방문한 라오스 청소년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2016년, 꿈에 그리던 이만수의 나라를 방문한 라오J브라더스 남녀선수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이만수 감독의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헌신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의 공로는 라오스 정부도 인정했다. 양국간 민간 외교와 라오스 야구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감독은 2016년 10월, 라오스 총리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2018년에는 라오스 대통령 표창과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또 지난 9월, 우리나라 대통령이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 양국 정상의 만찬 자리에 초대되기도 했다.

라오J브라더스 선수들은 지난달 하순에도 대한민국에 초청되어 전지훈련을 했다. 민간외교관 이만수 감독 덕택임은 말할 것도 없다. 구단주인 이 감독은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진행된 열흘간의 전지훈련에 이들과 동행했다. 광주제일고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들도 함께해 주었다. 라오스의 아이들에게 한국 방문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서로가 친구가 되어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과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솔직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데도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때면 야구라는 공통분모로 인해 이렇게 서로간의 국경이 없어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감독은 정말 야구하기를 잘했다며 “많은 청소년들에게 삶의 비전을 줄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감격해했다.

라오스의 청소년들이 꿈에 그리던 이만수의 나라에 와 기아구장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지난달 하순,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전지훈련을 한 라오J브라더스 선수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끝없는 재능기부의 길 

이만수 감독은 라오스에서 낮에는 야구장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밤에는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러다가 국내 오지에서 부르면 언제 어디든 달려간다. 그의 삶 전체가 재능기부의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8월엔 경북의성에서 이틀간 농촌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었다. 거기서 어린이들과 학부형들의 열화 같은 요청으로 의성군수와 군민들이 보는 앞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라 부담이 컸다.

이날 이만수의 이름은 그 진가를 발휘했다. 다시는 칠 수 없을 것 같았던 홈런을 터뜨리고 덩실덩실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는 프로야구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나눔을 실천하느라 양쪽 어깨인대 여러 군데가 끊어져 있다. 시간이 없어 수술도 미뤄온지라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거다.

“모처럼 홈런을 쳤는데 현역 시절 수백 개의 홈런을 칠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그는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지금도 야구할 때가 가장 가슴이 뛴다고 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를 부르고 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최근엔 대구옥산초등학교, 강원도 원주고등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등 각급학교는 물론 사회인 야구동아리들의 요청이 이어져 왔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 재능기부를 다녀온 곳이 50군데에 육박하고 연말까지 가야할 곳도 몇 곳 남아있다. 일 년 내내 한 주도 빠짐없이 재능기부를 다닌 셈이다.

옥산초등학교에서 재능기부를 한 후 아이들과 기념 촬영.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옥산초등학교에서 재능기부를 한 후 아이들과 기념 촬영.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든든한 후원자들

라오J브라더스 살림은 어떻게 꾸려나갈까? 최고의 후원자는 아내다. 부인 이신화 여사는 “당신이 50년 동안 받은 사랑이 너무 커요. 이제 갚아야 해요”라며 대구 참조은병원 광고모델료로 받은 2억 원에다 또 2억원을 보태 총 4억원을 라오스 유소년 장학금과 야구장 건립에 기부하는데 흔쾌히 승낙했다. 아들과 며느리도 부모님의 뜻에 따랐다. 가계는 강연 사례금으로 꾸려가고 있다.

야구장 건설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서 감사해요. 공사장 인부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0~40인분의 음식을 만드는 분도 있어요.” 라오스야구협회 제인내 사무총장의 아내 이야기다. 그는 금전적 보상을 전혀 받지 않고 이 엄청난 강도의 일을 감당해 내고 있다. 요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 텐데 자동차로 40분이 걸리는 야구장까지 직접 음식을 배달해 준단다.

“우리 사무총장의 부인은 힘들다는 내색 한번 없이 묵묵하게 기쁜 마음으로 그 먼 거리를 매일 달려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섬김인지요.” 지난 5년 동안 제인내 사무총장과 그 아내의 헌신과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날 라오스에 야구라는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 감독은 말한다.

“언론에서는 저를 주목하지만, 사실은 이런 분들이 진짜 주인공입니다. 이분들이 아니면 라오스에는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야구는 없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늘 돕는 자들이 있다.  왼쪽부터 김성준 매니저, 제인내 대표, 이 감독, 임재원 단장, 권영진 감독.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그의 주위에는 늘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다. 왼쪽부터 김성준 매니저, 제인내 사무총장, 이 감독, 임재원 단장, 권영진 감독.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만수 생각

이 감독은 처음 라오스에 들어갔을 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지난 5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야구 보급, 야구단 창단, 야구협회 창립, 아시안게임 출전, 지도자 양성, 야구단을 이끌고 금의환향, 그리고 야구장 건립...

“정말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질 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그의 야구인생은 도전과 모험, 열정 그리고 인내의 삶이었다. 패기도 있었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오직 ‘Never 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말자)’ 라는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는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 했을 때가 언제였을까 회상해 본다.

젊었을 때 남자로서 성공했고 목표했던 것들을 쟁취했다. 은퇴 후에는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무려 88년 만에 우승하는 팀의 일원으로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일주일도 가지 않았습니다.” 야구생활 50년, 뒤돌아보면 짜릿한 환희보다 스트레스와 싸웠던 기억들이 뇌리를 맴돈다.

“젊은 시절 세상 부귀영화를 움켜잡고 더 가지려고 했을 때 행복할 것이라 생각 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움켜잡으면 잡을수록 더 두렵고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세상 두려울 것 없어 보였던 그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는 손을 펴면 쟁취했던 부와 명예 그리고 팬들의 관심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손을 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오직 성공만이 최고라 생각하며 젊은 청춘을 야구에 올인했다. 물론 야구 때문에 인기도 얻고 유명해졌지만 그것들은 절대 그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때 어디를 가도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때 이 감독은 ‘세상 사람들이 불러준 이만수는 진짜 이만수가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명성도 순식간에 잊힌다는 것이다.

행복은 전성기 때가 아닌 인내의 세월 뒤에 찾아왔다. 프로야구 현장을 떠난 지난 다섯 해, 그는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재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지금 그에게 다른 욕심은 없다. 현재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오늘도 내일도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이웃에게 베풀고 싶을 따름이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에 자족하며 살아가고 싶다.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든 그것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때부터 세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보다는 지금,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며 좀 더 내려놓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관중도 사라지고 환호성도 그쳤지만 '영구결번 22' 이만수의 야구인생은 영원하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영구결번 22' 이만수의 야구인생은 영원하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야구선수는 유한하나 야구인생은 영원하다

지난 10일 경북 경산에서, 그의 오랜 팬클럽인 ‘포에버 22’와 함께 13년째 이어온 봉사활동을 했다. 그동안 연탄 나르기, 시설 방문, 밥퍼 사역, 해피하우스 지원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꾸준히 활동했는데 올해는 경산에 위치한 중증장애우시설 '루도비꼬집'을 방문한 것이다.

이날 만큼은 전국 각지에서 흩어져 사는 회원들이 만사를 제쳐놓고 참여했다. 그날 장애우들과 함께 손을 잡고 마을 한 바퀴를 돌면서 그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이렇게 잠시 왔다가 가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장애우들과 늘 함께하는 봉사자들의 헌신이야말로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행사를 마치고 늦은 시간 인천의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사랑해 주고 응원해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요즘 간혹 팬들에게 실망을 주거나, '내가 야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선수가 있다면 얼른 마음을 바꾸기를 그는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자기의 플레이가 아무리 멋져도 박수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어떨까? 야구가 직업인 프로선수라면 기량을 갈고 닦을 뿐 아니라 자기를 응원해준 팬들까지 자신의 야구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기를 선배로서 부탁하고 싶은 것이다.

변치 않는 팬 '포에버 22' 친구들과 함께.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변치 않는 팬 '포에버 22' 친구들과 봉사활동을 마치고.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꿈을 물려주리라

“이번에 아이들이 한국에 와보고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울기도 했어요. 이들은 한국을 통해 많은 비전을 갖게 되었죠. 각자 꿈을 갖게 된 동기를 친구들에게 전한다고 했어요. 게 중에는 한국에 와서 야구하고 싶다는 아이도 있고요.” 모든 아이들이 선수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야구를 통해 제각기 원대한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 이만수의 꿈이다.

이제 이 감독은 그의 인생 피날레라 할 수 있는 ‘20년 프로젝트’를 구상하여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라오스 야구 수준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라오스에 야구장 3면을 더 지어 네 잎 클로버 같은 4면의 완벽한 야구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 다음 국가대항 아시아대회와 세계대회를 유치하는 것이다.

“이게 제 마지막 꿈입니다. 이 사업이 끝나는 해엔 제가 80세가 될 겁니다. 어쩌면 저는 제 꿈이 실현되는 걸 못 보고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릅니다. 저는 주춧돌만 놓겠습니다. 후배들이 이 프로젝트를 잘 이어서 해 주었으면 합니다.”

100세 시대에 '80세 하늘나라'가 웬 말인가. 그만큼 그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는 1904년 미국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YMCA를 통해 한국에 야구를 최초로 보급해 준 것을 상기시켰다. “30년 50년 뒤 언젠가는 라오스인들도 ‘처음에 누군가가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해 주었구나’ 라는 말을 하겠지요. 이 말을 들을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야구인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방인들의 헹가래.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이방인들의 헹가래.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이만수의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그라운드에서 다시 새로운 기록을 세운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구로도 할 수 있는 일이 35가지나 된다고 말하는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새로운 이야기(新話)’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늘 가볍다. 그의 미소도 변함이 없다. 그는 그를 세상에 보내신 이의 섭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말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에 대한 하나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늘의 은총를 입은 그의 남은 생애가, 지나온 생애보다 정녕 더 아름다울 것이라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