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무의 ‘고단孤單’
윤병무의 ‘고단孤單’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1.28 13:45
  • 댓글 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병무의 ‘고단孤單’

 

아내가 제 손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손 놓겠지만

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

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서로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시집 ‘고단孤單’ 문학과지성사. 2013. 12. 02.

 

시는 마음의 소리라고 합니다. 시에는 진짜 속마음을 위반한 말이 나올 수 없고 또 나와서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거짓 고백을 하듯이 가짜 마음으로 속여서 쓸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시를 읽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시인이 들려주는 영혼의 소리를 들어보겠다는 의도쯤 될까요? 오래 전, 어느 문우의 말이 생각납니다. 자기는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시를 공부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엔 그 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조곤조곤한 어조로 진심을 담아서 들려주는 고백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지요. 시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만 격무에 시달린 일상에서 한 편의 시로 격려 받는 기분이 들 수는 있겠습니다.

시의 요체는 슬픔에 있다고 하지요. ‘고단孤單’과 ‘고단’은 동음이의어입니다.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온 아내, 가난하고 천할 때부터 고생을 함께 겪어온 아내라는 뜻을 지닌 ‘조강지처’란 단어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따뜻이 전달됩니다. 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고단한 아내의 삶을 다 들려주는 것 같아요. ‘아내보다 먼저/세상의 손 놓겠지만’, 누가 먼저 ‘그날’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손잡음과 놓음의 가벼운 행위를 ‘별세’라는 무거운 시어로 확장한 데서 온몸으로 전율을 느낍니다.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조금만 고단하면 좋겠다’는 바람만은 부부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읽은 시는 아늑함과 아련함이 뒤섞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