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의 장릉과 남양주의 사릉
영월의 장릉과 남양주의 사릉
  • 김외남 기자
  • 승인 2019.11.1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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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이 바로 보이는 곳에 남양주시 사릉에 있던 소나무를 남양주 문화원에서 1999년 4월 19일 옮겨심었다는 精靈松{정령송)이 있다.
또 영월 장릉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사릉에 옮겨 심어 애틋한 두 사람의 영혼을 위로했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묘역 사릉에 있던 것을 옮겨심은 소나무
남양주에 있는 사릉
영월에있는 단종의 장릉

 제실

경기 남양주시에있는 단종비 순정왕후의 사릉 위사진은 사릉에 다른재실

1698년(숙종 24)단종의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상(追上)됐지만 살아 생전 평생을 평범한 서민으로 살다 죽은 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 정씨가(鄭氏家)의 묘역에 묻힌 묘를 높여 사릉이라고 하였다.

정순왕후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가문에서 자랐다.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치러 왕비로 책봉되었다.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과 양녕대군이 왕비를 고른 후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다.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사육신을 비롯하여 70여 명의 충신들이 숙청되었으며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고 나중에는 관비로까지 곤두박질쳤다.

이 당시 놀라운 기록이있다. 신숙주가 정순왕후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왕비이지만 관비가 되었으므로 신숙주의 요청이 법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료들은 절개를 지키다가 처절하게 죽어 사육신이 된 상황에 왕비를 종으로 달라는 신숙주의 처신이 어처구니없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도 신숙주의 행동이 놀라웠는지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을 내려 정업원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슬하에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했던 왕실의 여인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세조는 말년에 정순왕후의 실상을 알고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집과 식량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순왕후가 그것을 고이 받을 여인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활하기 어렵다고 한들 왕후로서의 자존감을 꺾고 죽은 남편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된 자신의 한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은 조정의 눈을 피해 먹을거리를 건네주고자 감시병 몰래 금남의 채소 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봤다. 채소 시장 옆에 있는 영도교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다. 청계천에 놓인 가장 동쪽에 있었는데 정순왕후는 자신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귀양 가는 낭군을 배웅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4년간의 짧고 애틋한 결혼 생활을 한 두 사람 사이에는 후손도 없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 82세로 정업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다가 폐비로 만들고,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시숙부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또 세조의 후손이며 시사촌인 덕종과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보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단종 때부터 7대의 왕을 거친 그녀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을 치렀다. 능을 조성할 처지가 아니므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다. 해주 정씨 가족 묘역 안에 정순왕후를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 아직도 사가의 무덤이 남아 있다. 사릉에 있는 소나무가 모두 영월쪽으로 쏠려서 자랐다는 전설도 있다.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의 영녕전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이라 붙였다. 정순왕후의 부친 송현수를 함양군에 거주하는 저의 시댁에서 여산송씨 입향조로 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