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파계사의 원융회통
(34) 파계사의 원융회통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11.1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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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말과 글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말과 글이 사람을 만든다.’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조신호 기자
조신호 기자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동성로 대형 서점 벽에 걸려있는 문장입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부연하자면, ‘사람이 말과 글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말과 글이 사람을 만든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봄에 피는 꽃은 올해도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살아라!’ 라는 되새김이고, 가을 단풍은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맺은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유종의 미(有終之美)를 강조하는 대자연의 울림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난 11월8일 오후에 팔공산 파계사에 올라갔습니다. 유종의 미를 보여주는 단풍이 한창한 절의 풍경이 한층 더 아름다웠습니다.

만추의 팔공산 파계사를 찾은 또 한 가지 이유는 평소에 파계사의 '파계(把溪)'라는 의미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계사는 서기 804년 신라 애장왕(哀莊王 5년)에 심지국사(心地國師)에 의해서 창건(創建)되었습니다. 파계사라는 절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파계(把溪)는 ‘아홉 갈래 계곡 물(溪)을 붙잡는다(把.)’는 의미로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를 증명하듯이 절집 아래쪽 해발 약 490m 지점에 아담한 파계지(把溪池)가 있습니다. 필자는 ‘여러 갈래 계곡물을 붙잡는다, 즉 하나로 합한다’는 파계는 ‘서로 다른 쟁론을 화합하여 하나로 소통시킨다’는 원효대사(617-686)의 화쟁사상(和諍思想), ‘원융회통(圓融會通)’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과도 상통합니다.

파계사의 당우(堂宇)는 대웅전이 아니고,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원통전(圓通殿)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며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합니다. 파계사의 일주문은 파계지 아래쪽 약 1.3km 지점에 있다 점도 특이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여러 갈래의 개울물이 한 곳에 모이듯, 아래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一柱)로 바로 세우며 들어오라는 뜻입니다. 절 앞 주차장에 도착하면, 수령 약 25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서 높다란 2층 누각 진동루(鎭洞樓)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누각을 통과하면 법당인 원통전(圓通殿) 마당에 이르게 됩니다.

진동루(鎭洞樓)의 ‘진동(鎭洞)은 ‘산골짜기를 누르다, 진압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계, 즉 원융회통과 일체유심조가 파계사 도량의 마음의 양식이라면, ‘진동’은 이를 실천하는 행동강령으로 생각됩니다. ‘아홉 갈래 계곡의 물을 붙잡아 놓은’ 위덕(威德)으로 ‘그 아래 산골을 진압하는 의도로’ 파계사를 지었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동(洞)’ 자는 명사로 ‘골짜기, 고을, 동네, 동굴’이라는 뜻이고, 동사로는 ‘깊다, 그윽하다, 비다(공허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하니 ‘진동(鎭洞)’은 절 ‘아래 쪽 세상(내 자신)의 번뇌를 진압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파계와 진동이 결합된 그 의미가 특이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파계사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끌어당기듯, 또는 재물과 권력이 뭇사람들을 끌어당기듯 말입니다.

세상만사는 아홉 갈래 골짜기 물처럼 여러 가지 인연(因緣)로 마주치면서 백팔번뇌로 얽키고설키고 있습니다. 동(洞)이 ‘고을 또는 동네’를 의미하는 동시에 ‘비다(공허하다)’ 라는 뜻도 들어있으니, 이 세상 모든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임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이와 정반대로 살고 있으니 인생살이가 그야말로 고해(苦海)입니다. 이렇게 풀이하고 보니, 사람이 ‘파계사와 진동루’ 라는 말을 만들었고, 이 절의 현판에 새겨진 말과 글이 후세 사람들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처음에는 팔공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파계사가 마음에 끌렸는데, 그 뜻을 알고 나니 한층 더 끌아당기는 절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념적인 대결이 극에 달하여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미움과 저주는 서로 끌어당김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밀치며 넘어뜨리며 짓밟는 만행입니다. 날마다 뉴스에 나오는 정치가들이 세 치 혀로 소통과 화합을 반복하지만, 실제 행동은 그와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 정신으로 원융회동하지 않고 저주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아비규환이 반복되는 고해로 가고 있습니다. 상대방 정당을 해체하라고 협박하는 기사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파계사에 와서 파계(把溪)를 통한 원융회통의 화쟁사상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팔공산 단풍이 아름다웠습니다. 여러 갈래로 달라 보이지만, 하나로 화합하고 보면 모두가 하나입니다. ‘사람이 말과 글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말과 글이 사람을 만든다.’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