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33)
녹슨 철모 (33)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11.1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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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기다림이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멀리서 눈 떨어지는 소리 외에 어떤 희미한 소리가 태원의 귀에 들려왔다. 산짐승들의 소리일 수도 있지만 태원은 그것이 사람들의 소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라고 믿었다. 오래지 않아 2대대 첨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의무대 병력이 대항군인 줄 알고 갑자기 포위를 하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눈에 익숙한 구급차를 보고서는 맥이 빠지는 한편 반가워서 서로가 껴안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태원은 구급차를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나중에 대대 지휘부가 도착했을 때 그들의 낙오를 눈치채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장이 맨 마지막에 도착하였다. 그는 우선 그의 대대 병력 전부가 무사히 도착했는가 점검하느라 태원네를 보고도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평소 대대장의 성미로 봐서 아무리 바빠도 무슨 소리가 있었을 텐데 말이 없어 이상했다. 대대장 차에 타고 있던 통신병이 태원에게 달려와 물었다.

"아니 도대체 군의관님은 어디로 가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보다 일찍 도착하셨어요? 대대장이 계속 구급차는 잘 따라오고 있는지 무전하라고 해서 저는 계속 거짓말을 했어요. 잘 따라오고 있다고요.”

만약 의무대와 무전이 안 된다고 했거나 행방불명 되었다고 무전병이 보고했다면 우태원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눈치 빠른 마 병장의 재치 덕에 의무대 사건은 없었던 걸로 되었다.

다음 날은 공격을 일단 멈춘 채 중대별로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하는 날이었다. 전 부대가 이 산 저 산으로 혹은 들로 흩어져 참호를 파고 매복을 하였다. 중대별로 취사반 차량의 통과시간을 통보받았다. 그러나 점심때가 되어도 배식차가 오지 않았다. 산 위에서 밥을 타러 내려와 있던 보병들은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배식차는 끝내 오지 않았다. 점심을 굶었다. 저녁때 배식차가 오긴 했지만 한참 늦게 왔다. 그러나 차에는 밥이 없었고 건빵이 실려 있었다. 기름이 조달되지 않아 밥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무전기들도 고장 나서 통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몇 달이나 준비한 전쟁 훈련에서 이러하니 태원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무방비 상태에서 전쟁이 난다면 적의 총에 맞아 죽는 병사보다 굶거나 얼어 죽는 병사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야간에는 아무리 추워도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였다. 적에게 동태가 파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원은 산골짜기에서 얼어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외딴 민가를 발견하고는 그 집 부엌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바람만 막아 주어도 훨씬 따뜻하였다. 모두 심정이 비슷했는지 얼마 되지 않아 부엌에는 한 무리의 장교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평가하기 위해 나온 상급부대의 심판관도 섞여 있었다. 상급부대의 지휘관들은 혹한기를 일부러 택한 것 같았지만 이건 시험이나 훈련도 아니고 추위와의 진짜 전쟁이었다. 간이 커진 장교들은 마당에 쌓아둔 장작을 제 맘대로 가져와 부엌 아궁이에 넣고 불을 피웠다. 주인 부부는 노인들이었는데 점잖아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방구들이 달아 끓어올랐을 텐데도 쥐 죽은 듯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왔다. 모든 장사병은 그들의 군장을 전부 풀어 산 아래 가지런히 줄지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총에 착검하고 양쪽 가슴에 수류탄 한 개씩을 부착하였다. 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고지 탈환을 위해 일제히 돌격하는 것이다. 적을 만나 그들의 기관총에 죽거나 아니면 적과 직접 부딪치게 되면 백병전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돌격의 결과는 내가 죽거나 적이 죽거나 둘 중 하나가 될 터였다. 대대장까지 전원이 산의 정상으로 돌격하였다. 2대대는 영원히 이 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을 나아갔다. 의무대만은 본부에 남아 있었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조치이다. 태원은 남아서 하얀 눈 위에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놓여 있는 푸른 군장들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함성과 함께 산 위로 돌격하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니 눈물이 흘렀다. 태원의 눈물은 죽으러 가는 병사들을 보는 애처로운 슬픔 때문이 아니라 남자들이 그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평가를 받았다. 부대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보병으로서 전술 전략의 기본기와 수행능력이 인정된 것이다. 그리고 특히 가산점을 얻은 것은 부상자 후송과 처리에 대한 의무대의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에 대한 것, 또 혹한기에도 동상환자 발생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고 했다. 이런 것은 태원이 평소 사병들에게 동절기 동상 예방 교육 때마다 '씻고, 말리고, 비비자' 원칙을 철저히 주지시킨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대대시험 중 매일 밤 그들의 천막을 돌며 손과 발을 씻게 한 것이 동상 예방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부대는 그들이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보병들은 겨울에는 특별한 훈련이 없다. 그래도 예비연대의 사병들은 바빴다. 겨우살이 준비 때문이었다. 그 준비는 늦가을부터 시작된다. 겨울철 눈에 대비해서 수시로 산으로 가서 싸리나무를 잘라 모았다. 그리고 마을에 대민지원을 나가 짚도 확보해둔다. 이것들로 겨울이 되면 싸리나무 빗자루를 만들고 볏짚 창문 가리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삼삼오오 앉아 새끼도 꼬았다. 이런 틈에 별 할 일이 없는 장교들은 끼리끼리 모여 온갖 잡담을 나누었다. 가장 흥미를 끄는 이야기는 당연히 베트남전 참전 이야기였다. 전방 장교들은 예상보다 많은 수가 참전한 것 같았다. 베트남에서 귀국하면 일단 전방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안케‘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하였다고? 그거 다 말짱 거짓말이야. 월맹군에게 포위를 당해 몰살 당할 뻔했어. 당시는 우리 군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할 계획을 갖고 있어서 적극적인 전투는 안 하고 있었지.”

입담 좋은 5중대장이 좌중의 분위기를 휘어잡고 이야기를 엮어갔다.

"당시 참모총장 이세호의 생각은 베트콩 잡으러 나가면 아무래도 우리 병력의 손실이 있게 마련인데 눈치를 보니 곧 미국이 도망갈 것 같더라는 이야기야! 그래서 우리 군도 눈치껏 행동한 거야. 즉 공격적 전투를 하지 않고 진지에서 방어만 한 거지.”

이야기의 전개가 비교적 논리적이니까 같이 참전한 장교들도 수긍한다는 뜻으로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큰 실수였지. 우리가 그러는 동안 놈들은 우리 진지를 겹겹이 포위하고 결정적 시기를 기다린 거야.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한국군을 공격해서 전황이 불리해지면 미국 공군이 나타난단 말씀이야. 그래서 그놈들은 한·미군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시기를 기다린 거지. 게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놈들은 베트콩이 아니고 월맹 정규군이었어.”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 놈들이 드디어 박격포를 쏘며 우리 부대를 공격한 거야. 우리는 평소 단단히 호를 구축해놨고 또 이런 경우도 생각해서 잘 대비해놨으니까 놈들이 포를 쏘며 공격하더라도 처음에는 별 위협을 느끼지 못했지. 또 우리는 나름대로 놈들을 자주 상대해보았고 마지막에는 미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단단한 희망을 갖고 방어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지며 말투도 딱딱해졌다.

"아까 말했지만 놈들은 평소 우리가 상대해왔던 베트콩들이 아니고 월맹 정규군들이었어. 놈들은 우리가 평소 자주 싸워봤던 베트콩들과 달랐고 그들의 무기나 전투능력이 우리보다 한 수 위였어. 놈들은 우리의 작전을 환하게 숙지하고 있었고 또 약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더군. 중대장이나 소대장 등 지휘관이 참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놈들의 저격수가 어김없이 쏘아 쓰러뜨렸어. 계속 이런 식으로 당하니까 중대장, 소대장들도 겁을 집어먹었어. 호 밖으로 나가 지휘하려는 장교가 없을 지경이었지. 나중에 사단장이 헬기를 타고 와 하늘에서 직접 지휘를 할 정도였어. 놈들은 그 헬기마저 노리고 총을 쏘아대었지. 우리 부대는 전멸의 공포 속에 미군을 향해 공군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어.”

듣기만 해도 급박한 전황이 눈에 선했다.

"한참 다 당한 후 팬텀 전투기가 두 대 나타났어. 사실인지 모르지만 미국 해군 전투기는 다른 곳의 전투에 다 배치되고 우리나라 군산에서 우리 공군기가 왔다고 하더군. 공중지원이 이루어지고 증원부대가 도착하자 놈들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바로 ’안케의 영웅‘이 탄생한 거야. 즉 전투 중 죽은 임동춘 중위와 살아서 고지를 탈환한 이무표 중위 이야기가 나온 거지. 놈들이 다 도망간 고지로 부대를 끌고 올라온 중대장이 영웅이 된 거야. 그 사람이 한 거는 없어도 어쨌든 그 부대가 와서 놈들이 도망갔으니까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전쟁이 그렇더라고, 결과가 중요하더군.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우리 동료는 무능한 장교가 되고 적들이 후퇴한 빈터에 진격한 장교는 영웅이 되기도 하더군.”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끔 영웅들은 그렇게 탄생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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