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사랑의 시차'
최영미의 '사랑의 시차'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1.14 17:51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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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사랑의 시차'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 1998. 05. 10.

 

신생아의 밤낮이 뒤바뀌어 산모가 애를 먹는 경우가 있다. 우리도 첫아이가 그랬다. 낮을 밤으로 알고 쌔근쌔근 잘 자다가 밤이 되면 자지 않고 보챘다. 그 리듬이 생후 100일까지는 이어졌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아들보다 조금 큰 딸애를 키우던 이웃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철도 선로반 일을 한다고 했다. 야근하고 들어온 날이면 으레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다. 밤잠 못 자고 근무한 남편을 배려한 것임을 나는 한참 후에 주인집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았다. 사랑이란 것이 처음부터 대단한 게 아니라 작은 배려에서 커지고 그 가정이 더욱더 돈독해지는 것을 직접 확인한 셈이다.

시제를 임의대로 ‘상사화’라 붙인다. 나를 꽃의 자리에, 너를 잎의 자리에 놓고 다시 음미한다. 애련한 감정선 안으로 젖어든다.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상사화의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꽃과 잎이 서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지어진 것이겠다. 그래선지 상사화는 가정집보다 암자나 사찰에서 종종 눈에 띈다.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들 가운데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상사화와 비슷한 운명을 지닌 ‘꽃무릇’은 가을에 핀다. 계절이 다를 뿐인데 ‘참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녔다. 상사화는 미혼자의 사랑, 꽃무릇은 기혼자의 사랑, 엉뚱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의 시차가 이렇게 어긋날 수도 있겠다. 울림이 커서 명치가 아리다.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서사에 이입된 나머지 단장斷腸의 이별 주인공이 된다.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명징한 이유가 애달다. 화자는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한다. 시간으로 돈은 살 수 있겠으나 돈으로 시간을 사기는 어려운 법이다.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이 안타깝다. 언제부턴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 로망이 됐다. 이해한다면서 좌선坐禪을 강제하는 현실이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