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쇼펜하우어와 고슴도치 딜레마
(27)쇼펜하우어와 고슴도치 딜레마
  • 김영조 기자
  • 승인 2019.11.08 18: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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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적당한 친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이기적 염세주의 철학자 그리고 의지의 철학자, ()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쇼펜하우어  위키백과
쇼펜하우어 위키백과

 

그는 동료들이나 타인들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항상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이발사가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발사에게 면도를 시키지 않았다. 화재가 날까봐 2층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잠 잘 때에는 권총에 탄환을 넣어 침대 옆에 두고 잤다. 값나가는 물건은 집의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 금화는 잉크병 속에 넣어두었고, 지폐는 침대 밑에 숨겼다. 누군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가 가장 증오한 사람은 철학과 교수들이었다. 파벌과 마피아조직 같다는 이유에서이다. 특히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 인물인 헤겔(Hegel)에 대해서는 정신병자의 철학을 늘어놓는 추악한 남자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베를린대학 교수시절 헤겔에 맞서기 위하여 강의를 개설했다. 그러나 헤겔의 강의는 정원이 꽉 찬 반면 그의 강의는 불과 몇 명뿐으로 결국 폐강되고 말았다.

그는 헤겔에 대한 증오심으로 푸들(Poodle)이라는 개를 한 마리 샀다. 개의 이름을 헤겔이라고 지었다. 개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이 멍청한 헤겔 새끼"라고 구박하였다. 화가 날 때면 개의 배를 걷어차기도 했다.

다음으로 그가 경멸한 대상은 여성이었다. 그에게 여자들은 미치광이에 가까운 낭비벽과 본능적인 교활함, 뿌리 뽑기 어려운 거짓말 습관을 가진 존재였다. 그래서 여자를 어린이와 남자 사이의 중간단계에 서있는 하위의 존재로 보았다. 성적 충동으로 이성이 흐려진 남자들만이 키가 작고, 어깨가 좁으며, 엉덩이가 크고, 다리가 짧은, 여자라는 존재를 아름답게 본다고 비하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위를 피해 서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바늘이 서로를 찔러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추위 때문에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였다가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서로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실제로 고슴도치들은 바늘이 없는 머리를 맞대어 체온을 유지하거나 잠을 잔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고슴도치는 무리를 이루지 않고 홀로 다니는 외로운 동물이다. 그러나 고슴도치라고 하여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추위나 외로움을 느낄 때 고슴도치도 서로를 찾는다. 그러나 문제는 만나면 서로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추위와 외로움을 피하고자 다가가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이 현상을 통해 외부로부터 따뜻함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저 <부록과 추가(Parerga und Paralipomena)> '고슴도치 이야기'에 나오는 우화 얘기이다.

비관적 세계관을 가진 그에게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혼자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점점 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현대에 와서 이 우화는 쇼펜하우어가 쓴 의미와는 다르게 쓰이게 되었다. 아무리 타인에게 다가가려 해도 두려움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 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애착(attachment)의 형성이 쉽지 않다는 것을 표현한 심리학 용어가 고슴도치의 딜레마이다. 딜레마(dilemma)의 어원은 그리스어 di(두 번)lemma(제안, 명제)의 합성어이다. '두 개의 제안'이라는 뜻으로 진퇴양난의 의미이다. 선택지 두 개 중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상황,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행동을 보면 난처한 딜레마가 아니라 오하여 현명한 지혜로 보인다. 그들은 처음에는 서로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졌으나 이내 상대방에게 가시로 찌르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빠질 것이 아니라 고슴도치의 지혜를 배워야 하겠다. 사람이 필요로 인해 인간관계를 맺지만 가시투성이 본성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적당한 친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는 그 방법으로 예의를 제시한다. 예의를 통해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된다.

어리거나 젊은 시절에는 친구 사이에 내 모든 것을 줄 것처럼 친근하게 대하고, 낯선 사람에게는 외면하듯 대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친구관계나 인간관계에도 변화가 온다. 이때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이냐 단절할 것이냐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평소 소식이 없던 옛 친한 친구로부터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반가운 한편 걱정이 들기도 한다. 만날 것이냐 않느냐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딜레마이다.

그러나 인간관계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행복을 위해서는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승리를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는 용기가 없는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홀로 추운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다만, 친구 사이든 낯선 사이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 즉 가까이 하기도 어렵고 멀리 하기도 어려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하라.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이라고 했다. “인간관계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난로처럼 대해야 한다고 한 혜민 스님의 말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시인 김남조는 이러한 인간관계의 모습을 평행선이라는 시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본 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본 적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