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칠성동의 유래, 칠성바위
대구 칠성동의 유래, 칠성바위
  • 장희자 기자
  • 승인 2019.11.1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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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칠성동의 유래가 된 칠성바위가 대구지하철 칠성역 4번출구옆 광장에 진열되어 있다.

칠성(星七)바위는 대구 북구 칠성2가 302번지에 위치한 선사시대의 지석묘이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 대구역 4번출구로 나가서 우측으로 돌아서 역사건물방향으로 보면 역사광장에 원형화단을 설치해 놓았다. 화단에는 7개의 바위가 놓여 있는데 이 바위로 인해서 칠성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대구지하철 칠성역 4번출구옆 광장에 진열되어 있는 칠성바위 모습

원래 칠성바위는 칠성동 2가에 흩어져 있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다. 7개로 구성된 칠성바위는 하늘의 북두칠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경상감사로 부임해온 이태영(李泰永)이 꿈에 대구읍성 북문 밖에 북두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본 후, 그곳에 가보니 큰 바위 7개가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었다.

장남 이희갑바위를 중앙에 두고 6개의 바위가 방사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일곱 아들 이름을 제일 동쪽에 있는 바위에서부터 희갑(羲甲), 희두(羲斗), 희평(羲平), 희승(羲升), 희준(羲準), 희조(羲肇), 희화(羲華 : 初名 羲章)의 순으로 이름을 새겼다.  희한한 일은 일곱 아들이 장성함에 따라 그 아들들의 성품이 각각 자기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닮아가는 것이었다.

칠성바위 화단 .

울퉁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세 아들은 문과(文科)에 올라 출세를 하였다. 그리고 평범한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한 아들은 벼슬을 못하고 평범한 일생을 마쳤다.

야간에 본 장남 이희갑바위

그후 둘째 아들 희두(羲斗)가 순조(純祖) 2년에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어 내려 갔을때 선친(先親)의 치적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중앙에 정자를 세워 의북정(依北亭)이라고 하였다. 그 뒤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 칠성바위 앞에서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빌었다,

야간에 본 2남 이희두바위

칠성동(七星洞)이란 지명도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의북정(依北亭)은 퇴락하여 허물어지고, 그때 심어진 나무는 아름드리 거목(巨木)이 되었는데, 지난 1976년도에 도시계획으로 벌목되어 큰 나무 뿌리만 예쁘게 조각되어 현재 시민회관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

야간에 본 3남 이희평바위

칠성바위는 최초 옛 공회당(公會堂) 서편 공원 안에 있던 것을 1973년에 대구 시민회관(市民會館)이 건립되면서 잔디공원으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8년 칠성동으로의 이전 요구가 있었다.

야간에 본 4남 이희승바위

대구광역시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현 위치에 옮겨 놓았다. 고인돌은 제3호 고인돌을 중심으로 6기가 방사상으로 분포되어 있다.

야간에 본 5남 이희준바위

1973년 경북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했다  덮개돌 아래에는 굄돌이 없었고 지하 유구의 조사에서도 제1·2·5·7호에서 덮개돌 아래에 15∼30㎝의 돌무지[積石]가 있었을 뿐 제3·4·6호에서는 아무런 시설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고인돌에서는 부장품이 전혀 없었고 지하에서도 널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애초부터 무덤으로서의 성격보다는 거석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6남 이희조바위로 추정되나 이름이 지워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발굴조사때 덮개돌의 크기는 제1호가 길이 3.2m, 너비 2.7m, 두께 1.3m이고, 제2호가 1.5×1.1×1.1m, 제3호가 1.8×1.4×1.7m, 제4호가 1.7×1.6×1.8m, 제5호가 2×1. 5×1.5m, 제6호가 2×0.8×1.2m, 제7호가 2×1.3×0.8m이다.

이희장아라고 쓰여있는 바위로, 7남 이희화바위로 추정된다.

북두칠성은 동양에서는 국자 머리에서 자루쪽으로 가면서 각각 천추(天樞)·천선(天璇)·천기(天璣)·천권(天權)·옥형(玉衡)·개양(開陽)·요광(搖光)으로 부른다. 북두칠성을 참고하여 7형제에 이름을 붙였다

중앙에 있는 장남 이희갑바위

1암 추암(樞巖)은 장남 이희갑(李羲甲) 이름이 적혀있는 바위로,  표지석 뒷편에 중앙에 있는 바위로, 7개의 바위중 가장 잘 생기고 문(文)의 기운을 품고 있는 바위로,  한산이씨 족보에 의하면 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보국판보국 중추부사’ 관직를 역임했다고 한다.

우측으로 3번째 있는 2남 이희두바위

2암 선암(璇巖)은 2남인 이희두(李羲斗) 이름이 적혀있는 바위로, 표지석에서 우측으로 세번째 바위로, 문과 급제하여 ‘좌찬성(의정부 종1품)’ 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가장 남쪽에 있는 3남 이희평바위

3암 기암(璣巖)은  3남인 이희평(李羲平) 이름이 적혀있는 바위로, 표지석을 중심으로 가장 남쪽에 위치하는 바위로, 무(武)의 기운을 품고 있는 바위로 ‘황주목사’ 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표지석을 중심으로 좌측 두번째에 있는 4남 이희승바위

4암 권암(權巖)은  4남인 이희승(李羲升) 이름이 적혀있는 바위로, 표지석을 중심으로 좌방향 2번째 있는 바위로 문(文)의 기운을 품고 있는 바위로 ‘통훈대부(정3품)’ 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표지석을 중심으로 좌측 첫번째에 있는 5남 이희준바위

5암 옥형암(玉衡巖)은 5남인 이희준(李羲準) 이름이 적혀있는 바위로, 표지적을 중심으로 좌방향 첫번째 바위로, 문(文)의 기운을 품고 있는 바위로 ‘예조판서(정2품)’ 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표지석을 중심으로 우측 두번째에 있는 6남 이희조바위(추정)

6암 개양암(開陽巖)은 표지석을 중심으로 우측의로 첫번째 바위로, 이름이 세겨져 있지 않아서 6남인 이희조(李羲肇) 바위로 추정하고 있으며, 문과급제를 한 문관으로 ‘대사관, 대사성, 대사헌’ 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표지석을 중심으로 우측 첫번째에 있는 7남 이희화바위(추정)

7암 요광암(李搖光)은 표지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두번째 바위로,  7남인 이희화(李羲華)의 바위로 추정되는데, 바위에는 이희장(李羲章)이라고 적혀있으며, 희화의 초명(初名)이 희장(羲章)이였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보면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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