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파장'
신경림의 '파장'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1.07 15:2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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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05. 대구 동구 불로시장
2019. 11. 05. 대구시 동구 불로시장

 

신경림의 ‘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서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시집 『농무』 창작과비평사. 2000. 04. 30.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난 아마 장돌뱅이였을지 모른다. 그런 기시감의 연유에선지 장날을 좋아한다. 백화점은 한 시간만 머물러도 멀미가 나지만 재래시장은 몇 시간을 돌아다녀도 끄떡없다. 유년시절에 할머니 손을 붙잡고 읍내 5일장에 자주 따라다녔다. 없는 게 없어 보이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신세계 같았다. 할머니가 사주시던 풀빵 맛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지금은 불로장날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순전히 주전부리 먹는 재미에서다. 도시에 5일장이 선다는 건 행운이다. 한 장場이라도 거르면 괜히 궁금해진다. 초췌하고 늙수그레한 낯선 얼굴들이 왠지 남 같지가 않다. 고단한 삶의 궤적을 온몸에 새기고도 활력이 넘쳐서 좋다. 좌판에 널브러진 고등어, 시든 푸성귀조차 정겨운 것이다.

‘파장’은 장터를 배경으로 한 詩다. 가난하고 소외된 농민들의 현주소를 쉽고 진솔한 목소리로 형상화시켰다. 유유상종, 초록은 동색, 이런 말들이 겹쳐온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첫 행만 읽어도 마치 그 현장에 동참한 듯 순박한 시골 정서와 인정을 느낄 수 있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직설적인 서사가 핍진하게 흘러간다. 서울이 그리워진다는 것은 대저 귀농의 의미겠다. ‘섰다라도 벌일까’, ‘색시집에라도 갈까’, 객기의 유혹은 용기가 없어 미수에 그친 듯하다. 친구 같은 사람들끼리 막걸리나 소주 한잔 들이키며 애환을 나누다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귀가하는 쓸쓸한 파장罷場이다. 상행위를 뛰어넘어 인간애로 확장되는 이면에 환한 달빛이 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