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량산과 청량사 전설
봉화 청량산과 청량사 전설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10.28 17: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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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산세가 수려하다.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서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쉬엄쉬엄 오른 축용봉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면 선경에 든 듯 착각에 빠진다.
축영봉에서 본 청량사 전경. 이원선 기자
축용봉에서 본 청량산 전경. 이원선 기자

경북 봉화군 명호면에 위치한 청량산은 해발 870m로 높지 않은 산이다. 연이어 솟은 바위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 기암괴석과 깊은 절벽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산세가 수려하다. 이런 까닭에 한국 100대 명산에도 선정되는 등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198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가 있다는 청량산에는 옛 선인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신라시대 명필 김생이 처녀와 내기 끝에 신필로 탄생했다는 김생굴, 퇴계 선생의 오산당(청량정사),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이 마셨다는 총명수, 청량사를 창건한 원효대사와 소의 전설 등이다.

그뿐만 아니라 12봉과 12대가 있다.

12봉 : 장인봉,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축륙봉, 등 12봉우리

12대 : 어풍대, 밀성대, 풍형대, 학소대, 금가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 등 12개의 대(臺)

맞은편 축용봉(해발845m)에서 바라다보면 치마를 펼쳐놓은 듯하고 청량사가 자리한 터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힌다. 육육봉(12 봉우리)이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다. 이는 흡사 연꽃의 수술자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민왕의 친필 '유리보전'현판. 이원선 기자
공민왕의 친필 '유리보전'현판. 이원선 기자
청량사 칠층 석탑과 '삼각우송'이 보이는 풍경. 이원선 기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한 오마대(五馬臺)가 있으며 당시 친필로 쓴 청량사 유리보전(淸凉寺‘琉璃寶殿’)은 1974년 12월 10일 경북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또한 청량사에는 보물 제 166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2010 10 25 지정), 보물 제1919호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2016.11.16.지정), 건칠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91호(2015.12.28. 지정)등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현재 보물 제 166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은 ‘지장전’을 새로 개축하여 별도로 모시고 있다. 원래 있던 자리에는 개금불사를 통해 관음보살상이 대신하고 있다. 또한 보물 제1919호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2016.11.16.지정)은 얼마 전까지 종이로 만든 지불로 알고 있었으나 현재의 과학으로 비밀을 풀고 보니 ‘건철약사여래불’로 판명되었다.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서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장정 혼자서도 거뜬히 들어 옮길 수 있는 무게로 인한 해프닝이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바탕 층 삼베에 대한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결과 770~945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칠보살좌상 및 복장유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91호)역시 ‘건철보살상’이다. ‘건철’이란 흙이나 나무 등등으로 거푸집을 만든 뒤 삼배를 입히고 칠을 발라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만든 불상이다. 청량사란 절이 깎아 지르는 듯 위태한 산 중턱에 있다 보니 무거운 쪽 보다는 가벼운 쪽을 택한 듯싶다.

청량산 만추. 이원선 기자
응진전이 보이는 청량산 만추. 이원선 기자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80년대 초반, 군 입대를 앞두고 1박 2일로 청량사를 찾은 적이 있다. 하룻밤 묵는다는 말에 어머니께서는 돈보다 쌀이 최고라며 쌀을 배낭에 넣어 주셨다. 사실 돈이 지니기도 편하고 간수하기도 편해 선호했지만 지대도 높고 험하여 쌀이 최고라 했다. 말로만 듣던 청량사는 청량이란 말이 무색하게 숲 풀을 헤쳐가며 오르는 등산 길은 거친 숨소리를 동반하여 발걸음을 묶고 있었다. 몇 발자국 오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맥이 풀려  곧장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때는 8월 하순경으로 이마에서 샘솟는 땀이 작달비를 연상케 한다. 어머니의 정성이 무색하게 쌀자루는 또 얼마나 거치적거리는지, 돌아갈 길만 넉넉했으면 미련을 산에다 묶고 싶었다. 문득 청아한 물소리가 들렸다. 친구와 눈을 맞춘 둘은 사위를 둘러보고는 냉수마찰을 하듯 옷을 훌훌 벗어 땀을 씻었다.

뭇 벌의 날갯짓 소리만 앵앵거리는 절간은 인적이 끊어진 듯 조용했다. 흰 구름이 희롱하는 하늘을 벗 삼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얼마나 피웠을까? 친구란 이래서 좋은가 보다. 시간이 내준 자리에 우정이 쌓이기를 한 시진 정도, 한낮의 햇살이 산영을 길게 드리우며 선선한 바람이 일으키자 그제야 산모퉁이로부터 인기척이 인다. 손바닥 정도의 남새밭에서 호미로 지심을 잡던 스님이 돌아온 것이다. “우매한 똘 중만 있어서 찬이 변변치 못합니다.” 받아든 저녁상에는 풋고추, 상추와 배추가 동무를 하여 날아갈 듯하고 된장은 까만 것이 색이 바랬다. 시장이 반찬인가? 산을 오르느라 허기진 배는 상차림이 무한정이다.

청량사 전망대에서 본 청량사 전경, 이원선 기자
청량사 전망대에서 본 청량사 전경, 이원선 기자

산골의 밤은 일찍 찾아들어 부엉이가 울고 한 낮의 미련을 달래려는 쓰르라미는 날개가 부싯돌인 양 부딪치고 있다. 자장가는 딱히 필요 없어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의 속삭임과 바람소리가 귀에 정겹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먼데서 새벽닭이 홰를 치고 멍멍이가 운다. 눈곱을 비비며 축대 끝에 서자 발아래가 천 길 낭떠러지로 ‘휭’하다. 머리 한번 돌리면 피안이고 한번 돌리면 지옥이라더니 내가 여기서 간만에 단꿈을 꾸었던가? 머리털이 쭈뼛하고 오금이 저린다.

청량산의 진풍경은 단풍철인 지금이다. 쉬엄쉬엄 오른 축용봉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면 선경에 든 듯 착각에 빠진다. 어쩌다 낙동강에서 스멀스멀 핀 안개가 산 전체를 포근히 감싸 안으면 신선이 따로 없다. 삼대에 걸쳐 공을 쌓으면 볼 수 있으려나 세파에 찌든 미련한 중생에게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그저 선망이다.

전설! 청량사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청량산에서 멀지 않은 남면에 남씨 성을 가진 농부가 소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농부의 암소는 임신을 했고 소의 배가 불러 올 때마다 희망에 부풀었다. 재산이 재산을 만드는데 기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송아지가 자라면 큰 소를 먼저 팔까? 송아지를 먼저 팔까? 행복한 고민은 농부의 마음을 살찌웠다.

청량사 칠층 석탑과 '삼각우송'이 보이는 풍경. 이원선 기자
청량사 칠층 석탑과 '삼각우송'이 보이는 풍경. 이원선 기자

날짜는 어김없이 지나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다. 농부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송아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자라는 송아지는 머리에 뿔이 셋 달린 것이 사납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해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금껏 꿈꾸던 희망을 접는 것은 고사하고 길길이 날뛰던 녀석이 때만 되면 꼬박꼬박 돌아와 여물과 먹이를 조르는 것이다. 백수의 못된 아들을 둔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어떻게든 길을 들여 볼까 싶어 동네 사람들을 모아 코뚜레를 꿰어 보고자 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소가 어느 날부턴가 먼 곳을 보며 울고 앉았다. 이상타 여겨 주인이 가까이 가도 더 이상 날뛰지도 않았다. 그 의문은 곧바로 풀려 멀리서 고승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농부는 생각했다. “저 영물이 아마도 스님과 인연이 닿은 모양이다. 이왕에 애물단지로 있을 바에는 차라리 스님께 시주나 해버리자!”

그때 나타난 스님이 바로 원효대사였다. 원효대사를 만난 삼각의 소는 순한 양처럼 행동했으며 곧바로 청량사 불사에 들어갔다. 서까래조차 인력으로 어찌하기는 힘든 불사였다. 신라 초기의 불교는 분황사나 황룡사처럼 대체적으로 들판에 절을 지었다면 7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산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산이란 것도 보통의 산이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절벽이 즐비한 청량산이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낭떠러지로 시체조차 찾기 힘든 죽음이다.

대들보와 기둥은 소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것도 보통의 소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 어려움을 삼각의 소는 의연하면서도 꿋꿋하게 견디고 있었다. 소는 원래 음전하면서도 우직한 동물이다. 힘은 장사일지라도 삼척의 아이가 부릴 수 있는 그런 동물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지몽매한 듯해도 나름대로 삶의 철학이 있었다. 들판에서 길을 잃으면 가시덤불이나 산소 옆에 쥐 죽은 듯 앉아서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다.

청량사가 보이는 풍경. 이원선 기자
청량사가 보이는 풍경. 이원선 기자

처음의 염려와는 달리 소의 힘을 빌린 청량사 불사는 무사히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 첫 번째 공로는 단연 소의 것이었다. 그런 그 소가 준공을 하루 앞두고 죽은 것이다. 그제야 그 소가 “지장보살”의 화신임을 알아본 것이다.

소의 죽음을 불쌍히 여긴 사람들은 절간 바로 앞에 무덤을 만들어 고이 묻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소의 신화는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절간 바로 앞, 그러니까 소의 무덤쯤 되는 자리에서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자란 소나무는 이상하게도 가지가 셋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옛날 전설속의 뿔이 셋 달린 소처럼 말이다.

전설이 되 살아난 지금 사람들은 그 나무를 일컬어 ‘삼각우송’ 또는 소의 무덤을 상기 시켜 ‘삼각우총’이라 부른다.

보물 제 166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을 모시는 지장전. 이원선 기자
보물 제 166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을 모시는 지장전. 이원선 기자

* 10월 26일 청량사에서는 천도재(죽은 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불교의식)가 거행되고 있었으며 사찰의 요청에 의하여 내부의 촬영은 생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