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합법적인 불공정
(33) 합법적인 불공정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10.28 12: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록위마의 어불성설
pixabay
pixabay

지난 10월 22일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있었다. 그 내용에 “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자는 것이었다” 라는 말이 묘한 메아리로 울리고 있다.

필자가 밑줄을 친 어구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은 비문법(非文法)적인 표현으로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문법의 선택제한(選擇制限; selectional restriction) 규정을 위반하는 말이다. 문법의 ‘선택제한’은 문장을 구성하는 어휘 항목이 지켜야 할 의미구성의 규칙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 ‘그 처녀의 남편은 군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처녀의 남편’이라는 말은 의미상으로 성립될 수 없으므로 비문(非文)이다. 이와 같이 의미상의 모순을 일으키는 어휘의 배치를 금지하는 것이 '선택제한'이다.

대통령이 말한 ‘합법적인 불공정’도 ‘처녀의 남편’처럼 의미상의 모순이므로 비문이다. ‘합법적’이라는 말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므로, ‘공정한’ 것이니 ‘불공정’은 있을 수 없다. ‘합법적인 불공정’이 성립한다면, 그 법은 모두에게 평등한 법이 아니라, 특정인들이 특권을 누리도록 정해 놓은 악법이다. 또는 법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잘못된 사법 운영을 의미한다. 결국 ‘합법적인 불공정’이라는 말은 ‘(불)법적인 불공정’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는 표현이다. 또한 합법과 불공정의 상관관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인식에서 나온 말이다.

대통령의 연설 중에 ‘공정’이라는 말을 27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면,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합법적인 불공정’이 있을 수 있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공정사회를 구현하는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가능성이 희박한 말이다.

이와 정반대 현상이 『사기』 「진시황본기」에 ‘위록지마(謂鹿止馬)’에 관한 고사로 전해지고 있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趙高)가 거짓 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삼았다. 그런 연후에 조고는 경쟁관계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던 중 조고가 자기를 반대하는 중신들을 가려내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어느 날 사슴을 2세 황제에게 바치며 조고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이에 대해 2세 황제가 웃으며,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어찌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오?”라고 했다. 그러자 조고는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며 “이것이 말이냐, 사슴이냐”고 물었다. 조고를 두려워한 상당수 신하들은 말이라고 동조했으며, 잠자코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일부는 사슴이라고 부정했다. 조고는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모두 죽였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로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비유할 때 이 고사가 인용된다.

‘지마위록’이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라면, ‘합법적인 불공정’은 오늘날과 같은 이념 대결 시대에 '국민들을 눈을 어둡게 하며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현상' 으로 비유할 수 있다.

말과 글은 사람의 생각을 키우는 씨앗이고, 그 씨앗이 잉태하여 행동으로 나타난다. 말과 행동이 인간의 삶이고, 문화이고, 역사이다. ‘지마위록’과 ‘합법적인 불공정’ 둘 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말이 안 되는 말, 즉 사리에 어긋나는 언행이다. 이런 어긋한 말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들의 삶과 문화와 역사가 무질서에 함몰될 것이다.

진시황 사후, 조고(趙高)의 농단에 휘몰리던 진나라는 천하통일 15년을 넘기기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그 멸망은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시작하여, 항우와 유방의 대결 끝에 유방의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중국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었다.

사리(事理)는 세상만물의 이치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글이 사리에 어긋나면 궤도에서 벗어난 행성(行星)처럼 한 줄기 운석(隕石)이 되어 우주에서 소멸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