塗炭之苦(도탄지고)
塗炭之苦(도탄지고)
  • 신문수 기자
  • 승인 2019.11.0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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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흙물과 숯불 속에 떨어진 고통

- 몹시 困難(곤란)한 경우를 말함

ㆍ塗(도) : 1.바르다 2.진흙 3.길 塗料(도료) 塗褙(도배) 塗炭(도탄)

ㆍ炭(탄) : 1.숯,목탄 2.석탄 3.탄소 炭鑛(탄광) 炭素(탄소) 石炭(석탄)

ㆍ之(지) : 1.가다,이르다 2.이,이것,지시대명사 之東之西(지동지서) 之子(지자)

ㆍ苦(고) : 1.쓰다,쓴맛 2.씀바귀 3.괴롭다,아프다,고통받다 4.멀미 苦難(고난) 苦悶(고민) 苦待(고대) 苦杯(고배) 苦笑(고소) 苦心(고심) 苦學(고학) 刻苦(각고)

 

남북조 시대에 그 강성함을 과시하던 前秦(전진)도 국력이 차츰 쇠퇴하고 기원 385년에는 後燕(후연)과 後秦(후진)에게 공격을 받아 國都(국도)인 長安(장안)에서는 사람을 먹을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였다. 國主(국주)인 符堅(부견)은 五將山(오장산)으로 퇴거했으나 後秦軍 (후진군)에게 체포되어 그 시종 10여 명과 함께 新平(신평)으로 압송되어 어느 사원에 갇혔다. 後秦王(후진왕)인 姚長(요장)은 使者(사자)를 부견에게 보내어 나라의 玉璽(옥새)를 내밀며 교섭시켰지만 부견은 이를 거부하고 요장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그는 부견을 죽이도록 하였다. 부견의 아들인 符丕(부비)는 당시 鄴(업)에 있었지만 前秦(전진)의 幽州刺史(유주자사)인 王永(왕영)은 부견의 죽음을 듣고는 업으로 사자를 보내어 부비에게 「晉陽(진양)까지 오너라」하고 제의하였다.

진양에 도착한 부비는 장안이 함락되어 잃어버림과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고, 왕영의 간절한 소원에 따라 곧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다음해 6월, 부비는 왕영을 左丞相(좌승상)으로 임명했다. 왕영은 격문을 작성하고 전진 각 지역의 군사를 규합하여 후진과 후연을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주장은 이러했다. 「先帝(선제)는 적에게 붙잡히고 황실은 야만인의 거처가 되고 나라도 황폐하여 백성은 도탄에 빠져있다」 이 격문을 읽은 관리는 각지에서 거병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양으로 대군이 모이고 왕영은 그를 지휘하여 반격하였으나 오히려 기원전 394년 後秦軍(후진군)에 패하여 전진은 멸망하였다.

 

며칠 전에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3분기 경제성장율이 0.4%로 발표되었다. 경제전문가들은 금년 경제성장율 2%달성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고 전망한다. 대내외적으로 경제여건도 좋지못한 게 사실이다. 서민들의 삶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모든 국민이 힘을 모아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底力(저력)이 있다. 1997년의 외환위기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力量(역량)이 있는 국민들이다. 다만 염려가 되는 것은 정치권이 국민들을 선동하여 편가르기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민생을 위하여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국민의 통합을 위해 힘써 주기 바라며, 더 이상 국민들이 심한 갈등으로 "塗炭之苦"(도탄지고)을 겪지 않도록 정치권이 지혜를 모아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