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31)
녹슨 철모 (31)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10.28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부터 대대장 관사에 늘씬한 처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관사는 부대 안에 있었다. 안 그래도 여염집 여자가 귀한 기지촌에서 더구나 부대 안에 풋풋한 젊은 여자가 나타났으니 전 부대 장사병의 마음이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 처녀는 성격이 활발한지 멀리서지만 많은 군인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에도 거리낌 없이 뛰어다니고 까불대며 다녔다. 이 바람에 군인들의 가슴은 더욱 더 설레고 안달이 났다. 군인들은 며칠 동안 마음이 뒤숭숭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태원이 먼발치로 보기에도 인물이 괜찮아 보였고 몸매도 훌쩍한 모습에다 풍기는 모양이 무척 싱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던 어느 날 대대장이 태원을 불렀다.

"닥터 우, 당신 혹시 애인 있어?"

대대장은 태원을 대개는 ‘닥터’라고 불렀다. 미군들은 목사나 의사는 군인이 되어도 계급보다는 그 직업을 불러준다고 한다. 대대장도 나름대로는 태원을 존중해준다는 표시였다. 그는 눈치도 없이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서울이라도 자주 보내주려는가 하는 마음에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그러자 대대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그리고 왜 이야기를 중단하고 마는가. 태원은 의아했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대답은 한 달 뒤에 알게 되었다. 병주가 면회를 와서 둘이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 대대장과 그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대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런 줄도 모르고 전번에 처제를 중매 서려고 했었네.”

그 말을 듣던 그 부인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런 분은 반드시 애인이 있을 거라고요.”

 

겨울이 되자 태원의 부대는 엉뚱한 일로 바빠졌다. 사단 예하 각 부대 대항 스케이트 대회가 매년 2대대 앞 논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55사단은 아주 독특한 부대였다. 사병들이 입대를 하면 누구에게나 스케이트를 하나씩 외상으로 나눠주고 3년 동안 그 대금을 분할 납부케 했다. 그리고 유행가 100곡을 외우게 했다. 이런 특이한 풍습은 사단장 손 장군이 오면서 시작된 것으로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흔히 하는 소리가 군대 가서 3년을 썩고 온다고 한다. 그만큼 손해를 본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 부대에 오면 썩어나가는 곳이 아니고 즐겁게 근무하고 또 얻어가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제대할 때 손에는 스케이트 하나를 들고 머릿속에는 100곡의 유행가를 지니고 가게 한다. 그만큼 얻어서 가는 곳이 우리 부대라는 것이다. 사단장은 그의 지휘 방침을 실천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전 사단 장사병들을 모아 공연을 관람하게 하였다. 연예인들 공연 때는 가급적 많은 사병이 무대로 올라가 그들과 같이 춤추고 노래하게 하였다. 무대 아래에서도 춤추고 노래하고 흥겨워하였다. 매달 서울가서 연예인들은 섭외해오는 정훈참모는 죽을 지경이었지만 대신에 장병들은 신이났다.

겨울에는 전 사단 장사병들을 스케이트대회에 참여하게 하였다. 원래 보병은 운동이나 공사를 해도 모두 전투 개념으로 한다. 즉 상대방에게 이겨야 했다. 이 대회도 보병들로서는 죽기 살기였다. 단 하루의 스케이트대회를 위해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초겨울부터 각 부대는 마치 전투처럼 스케이트 시합을 준비했다. 대회가 임박해서는 선수들은 하루 종일 스케이트만 탔다. 장교들은 전부가 선수가 되어야 했다. 장교 중에 스케이트를 잘 타는 사람은 개인 선수로 출전하고 나머지는 계급별 릴레이와 참모별 릴레이 등에 참가해야 했으니 장교들은 다 출전해야 하는 것이었다. 태원은 운동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침 일과가 끝나면 그도 언 논바닥에서 스케이트 연습을 하였으나 계속 넘어지기만 했다. 전방에서는 장교들의 권위가 서릿발 같은데 얼음 바닥에 넘어지고 옷을 버리게 되니 창피해서 태원은 더 이상 연습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대대장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는데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정 그렇다면 군화를 신고 시합에 참가해.”

2대대는 학군단 출신 한 소대장이 대학 다닐 때 필드하키 선수를 하였는데 이 장교가 대대 전 선수들을 책임지고 훈련시키고 있었다. 지나다니다 보면 선수들은 얼음 바닥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와서 또 밤늦게까지 연병장 한쪽에 모여서 지상에서 스케이트 타는 폼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에 대대장은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막상 선수로 뽑힌 당사자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몸도 피곤할 뿐더러 배가 고파 더 이상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 따로 간식이 주어지지 않고 게다가 못하면 기합을 받게 되니 잘못하면 시합도 하기 전에 선수들이 쓰러질 판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정신전력강화’라며 사병들을 몰아세우고 또 안 따르면 매질을 하였다. 물론 이런 강압적 훈련 방식은 이 소대장만의 잘못이 아니고 사단 내의 모든 군인들과 운동선수들의 훈련은 그런 식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경향이 있는 듯하였다. 하지만 대대의 선수로 차출된 사병들은 못 먹고 허기가 져 더 이상 강훈을 견뎌낼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훈련받던 사병 중에 장기 하사 둘이 있었는데 이들이 주동을 하여 이 소위가 내려치는 몽둥이를 뺏어 오히려 이 소위의 정수리를 내리치고 말았다. 머리가 찢어지니 피가 콸콸 흘렀다. 이 소위는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이들 무리에게 살기를 느끼고 상처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뒷산으로 도망을 하였다.

결국 이 항명소동을 일으킨 하사들은 사단 군법회의로 넘어가고 이 소위는 딴 부대로 전출가게 되었다. 이런 큰 사건이 있었지만 스케이트대회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시합날 응급환자가 발생하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태원은 경기장을 빠져나와 숨어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사단장이 시골구석에 온다니까 새벽부터 요란했다. 특히 2대대는 혹시나 사단장이 둘러볼지도 모른다며 영내 취사병들에게 평소에 입지도 않던 흰 위생복에다 모자를 쓰게 했다. 그들도 자신들의 모습이 이상하여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헌병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정말 멋있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단장은 잠깐 왔다가 권총을 한 발 하늘에다 쏘며 “김일성 나오라!"고 외치고 다시 “전 부대 파이팅!” 하고 소리치더니 가버렸다. 그의 등 뒤로는 사단장에 대한 경례하며 붙이는“전투!" 하는 구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중대장들은 눈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부하들을 꾸짖거나 격려하면서 경기를 진행하였다. 심판이 조금만 애매하게 하여도 그들은 쉽게 화를 내며 덤비고 싸웠다. 태원은 이런 사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평소에는 부하들을 무슨 원수 만난 듯 대하는 중대장들이 남들과의 대결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의 부하들을 위해 싸운다. 이런 모습이 바로 진정한 보병의 멋일 것이다. 태원은 점심 때 의무실로 돌아와 버렸다. 밖에서는 계속 함성 소리가 요란하였지만 그는 '에리히 프롬'을 읽으며 그의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소유냐, 존재냐' 라는 제목의 글은 짧지만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책이었다. 과연 그의 주장이 현실 가능한 소린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찌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지 않고 존재로서만 보고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태원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였다.

 

스케이트대회가 끝나자 계속 바쁜 일이 생겼다. 곧이어 A.T.T(대대시험)가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그들의 성적을 알기 위해 학년 말 시험을 치르듯 군부대도 연말에 시험을 본다. 대대급 부대의 실력을 평가하는 것이 바로 A.T.T라는 것이다. 시험 형식은 가상의 적 부대를 편성하여 공격· 방어하면서 1년 동안 대대가 쌓은 훈련실력을 평가한다고 한다. 이런 무렵 병주가 찾아왔다. 집에서 결혼 말이 있으니 자신의 집으로 한 번 가야 될 것 같다고 하였다. 태원은 내년에 후방으로 전출되면 그때 가서 천천히 결혼 이야기를 꺼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병주의 집에서도 둘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미 깊은 관계에 이른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방에 간 태원이 아무 말도 없으니 그들 부모는 나름대로 딸애의 결혼에 대해 다른 계획을 세우는 눈치 같았다. 갑자기 태원의 마음은 바빴다. 부대시험도 눈앞에 다가오고 의외의 일이 생겼으니 마음이 급했다. 대대장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잠깐 휴가를 얻어 그는 병주의 집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병주의 부모는 딸과 태원의 관계를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태원이 입대 전에 항상 불만 가득하고 도전적이며 공격적이던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어 그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보는 눈치였다. 결혼에 대해 선뜻 찬성해주지 않았다. 태원의 성격이 작은 일에는 오만가지 신경을 쓰고 고민을 하지만 정작 큰일이 생기면 용기와 투지가 생기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대대장이 짜증을 내는 눈치였지만 또다시 외출 허가를 얻어 병주네 부모를 찾아갔다. 병주의 부모도 군의관이 된 태원을 보자 전과 달라진 그의 모습을 느낀 것 같았다. 다시 만나니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딸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며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었다. 이 말끝에 자신의 딸이 평소와는 달리 확고하게 태원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결국 결혼이 성사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어렴풋하게 감지되었다. 상대방에 대해 격정적이고 애틋한 그리움이 사랑의 감정인지 아니면 소유의 감정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병주와 태원은 깊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결혼에 이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