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슬픈 역사가 서린 영월 청령포
단종의 슬픈 역사가 서린 영월 청령포
  • 염해일 기자
  • 승인 2019.10.22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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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청령포 순회
유배 당시 단종이 거처하였던 단종어가의 모습(염해일 기자)

운경건강대학원(학장 이태우)은 17일(목) 역사 탐방을 위하여 영월에 있는 ‘한반도 지형’과 단종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는 ‘청령포’로 순회학습을 다녀왔다.

운경건강대학원은 곽병원 부설 대학원으로 대구 시내의 의사들을 초빙하여 건강 강좌를 열거나 우수한 강사들을 초빙하여 인문학 강좌 등을 제공하고 있다. 야외 수업으로 순회학습, 자연학습, 추억 만들기 여행도 실시하고 있다.

이날 오전 8시 200명 가까운 학생들이 5대의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학교를 출발하여 11시 40분에 영월 ‘한반도 지형’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 뒤편 산을 올라 서강 낭떠러지 위에 있는 전망대에서 ‘한반도 지형’을 둘러보았다.

오간재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반도지형의 모습(염해일 기자)

제1전망대에서 한반도 지형을 살펴보고, 자리를 옮겨 제2전망대에서 다시 한 번 더 한반도 지형을 조망했다. 제2전망대인 오간재전망대는 앞이 탁 트이어 ‘한반도 지형’을 조망하기에 좋았다.

‘한반도 지형’은 평창에서 영월로 흘러오는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수되어 서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220㎞의 평창강이 심하게 굽이쳐 흘러내려오다가 주천강과 합쳐지기 전에 크게 휘돌아 치면서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한반도 지형의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아 실제 한반도와 비슷한 '한반도 지형'을 만들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였다. 바다 대신에 강이 한반도 지형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반도 지형’의 오른쪽은 절벽이 형성되어 마치 한반도의 동해안 지형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울릉도와 독도를 닮은 바위도 있었다. 한반도 지형의 왼쪽은 서해를 닮아 모래사장도 있었다. 절벽을 따라 흘러내린 산줄기가 백두대간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한반도 지형’에 들어가려면 임시 다리인 섶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큰물이 나서 섶 다리가 떠내려가면 옛 교통수단인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나라 한반도를 닮아서 ‘한반도 지형’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반도 지형’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도 ‘한반도 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반도지형은 2011년 6월 10일 문화재청이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 제75호'로 지정된 이후 더욱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운경건강대학원생들이 청령포로 들어가기 위하여 줄을 서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염해일 기자)

한반도 지형을 관람하고 단종의 애사가 서려 있는 청령포로 달려갔다. 청령포는 영월의 서강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은 육육봉이 험준한 층암절벽으로 높이 솟아 있고, 주위에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내륙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유배의 땅 청령포는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청령포는 1457년(세조3)에 조선의 6대 임금이신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다.

청령포 주차장에서 내려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 청령포로 들어갔다. 강 건너 나루 옆에는 단종의 유배길과 사형길에 금부도사로 왔던 왕방연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왕방연은 왕명을 수행하는 관리였기 때문에 단종에게 내려진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한없이 슬펐다고 한다. 그 당시 왕방연의 심정을 담은 그의 시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과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가더라.”라는 ‘회단종이작시조(懷端宗而作時調)'가 비에 새겨져 있다.

단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는 단종의 모습(염해일 기자)

왕방연의 시를 읽고 청령포로 들어가서 소나무 숲속에 복원된 ‘단종어가’로 들어갔다. 단종어가는 2004년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모습을 재현하여 놓았다. 시녀들이 거처하였던 일자형 초가집부터 들어갔다. 초가집 안에는 시종들의 침실이 있고, 시종들이 다듬이질하고, 바느질하고, 식모가 밥하는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하여 놓았다.

시녀들이 살고 있는 초가집 어가를 관람하고 기와집 단종 어가로 들어갔다. 어가 사랑채, 단종을 모시는 사령의 모습, 어가 대청마루에 놓인 장롱, 이불을 단정하게 개어 얹고, 단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는 단종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하다.

단종어가 뜰에 세워진 '단묘재본부시유지'비의 모습(염해일 기자)

단종 어가 뜰에는 단종의 옛 집터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 39년에 세운 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영조가 직접 써서 하사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과 비의 뒷면에는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令原營竪石’란 글이 새겨져 있다. 청령포라는 이름은 영조가 직접 쓴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란 글에서 찾을 수가 있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단종의 슬픔을 보고, 단종이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관음송' 모습(염해일 기자)

단종어가 뒤편에 있는 소나무 숲 속에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으로 걸어갔다. ‘관음송’은 단종이 이 소나무 가지 사이에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하였다. 이 소나무가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모두 보았다고 하여 '볼 관(觀)'자,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여 '소리 음(音)'을 써서 ‘관음송(觀音松)’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관음송은 수령이 600년 되었고, 나무 높이가 30m, 가슴높이 둘레가 5.2m 크기이며,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유배 당시 단종이 정순왕후를 생각하면서 쌓았다는 망향탑의 모습(염해일 기자)

관음송을 관람하고 청령포 서쪽 능선에 있는 ‘망향탑’을 찾아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능선 중간 절벽에 돌로 망향탑을 쌓았다. 망향탑은 열일곱 살 단종이 배필이던 정순왕후 송 씨를 생각하며 주위에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돌탑을 쌓았다.

정순왕후 송 씨는 궁궐에서 쫓겨난 후 지금의 숭인동 산기슭에 초가 삼 칸을 짓고, 매일 조석으로 인근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무사를 기원했고, 단종의 죽음을 알고는 평생을 매일 조석으로 통곡하며 명복을 빌었다. 정순왕후는 사무치는 원한을 가슴속 깊이 묻고 82세까지 한 많은 인생을 살았다.

망향탑을 관람하고 다시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전망대에서 서강을 내려다니 천 길 낭떠러지 아래 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물 위에 하얀 꽃송인지, 하얀 물방울인지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다.

단종이 유배 당시 노산대에 올라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면서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의 모습(염해일 기자)

다시 계단을 걸어 내려 망향탑을 지나 두 갈f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단종이 한양 쪽을 바라다보며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정순왕후를 생각하였다는 울퉁불퉁한 노산대에 올랐다. 노산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한 절벽 밑으로 서강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노산대에서 나무 계단을 타고 솔숲으로 내려왔다. 소나무 숲의 가장자리에 ‘금표비’가 세워져 있다. 금표비 앞면에는 ‘청령포금표비(淸冷浦禁標碑)’, 뒷면에는 청령포의 동서 방향으로 300척, 남북으로는 490척 안에서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고, 퇴적된 흙을 파가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청령포의 소나무 벌목을 금하고, 청령포의 흙을 파가지 못하게 하였다는 '금표비'의 모습(염해일 기자) 

청령포에서 금표비까지 관람을 마치고 서강을 따라 배편으로 주차장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길, 대구를 향해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로 영월이 간직한 역사와 그 역사에 깃든 아픔들이 밀려오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