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길에서 만난 분황사 3층 모전석탑과 선덕여왕②
왕의 길에서 만난 분황사 3층 모전석탑과 선덕여왕②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10.1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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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의 정이 더욱 불타올랐고 마침내 지귀는 화귀(火鬼)로 변하고 말았다.
여근곡(女根谷)이란 지명이 있어 백제의 병사 500여명이 숨어있는 지라 이를 에워싸서 섬멸하였다.
당나라 수군의 기벌포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는 등 신라의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는다.
캄보디아 앙코르사원, 주위로 많은 물이 보인다. 이원선 기자
캄보디아 앙코르사원, 주위로 많은 물이 보인다. 이원선 기자

감실은 4면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곳은 비워져 있다. 남쪽의 감실에 있는 불상 역시 본래의 것이 아닌 후세에 만든 것이다. 이를 미루어 짐작컨대 일본인들이 모전석탑을 수리, 복원한 까닭은 모전석탑이 품은 고유의 유물을 노리는 한편 우리나라에는 그들의 힘을 과시한 듯싶다. 당시 일본인들이 모전석탑의 복원을 빌미로 노략질하여 밀반출한 유물들은 무엇일까? 또한 비이욘사원에서 도둑질한 유물은 무엇일까? 저 야비한 족속들은 현재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의 비밀 수장고를 열어 유물의 출처를 일일이 캐기 전에는 잃어버린 유물의 형태와 수량 등등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그들의 잇속을 위해 노략질한 유물을 밀반출한 행위는 도리천에 영면하신 여왕님이 진노하여 무덤을 박차고 나올 만큼의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여왕이 당초 모전석탑에 품은 원대한 꿈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상님께 고개를 들 수가 없는 현실을 떠나 무언가 잃어버리긴 잃어버렸는데 뭘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고 한심한 지경이다.

이는 파란만장한 여왕의 생애와도 일맥상통한 듯싶다. 비록 신분은 여왕일지라도 생애는 순탄치 않아 정치적으로 어려운 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의 미모를 가짐으로써 남다른 전설을 남긴다.

컴보디아 바이욘사원, 미완의 복원으로 주위로 많은 석재가 흩어져 있다. 이원선 기자
컴보디아 바이욘사원, 미완의 복원으로 주위로 많은 석재가 흩어져 있다. 이원선 기자

이즈음 신라에서는 여왕의 미모에 반하여 상사병이 걸린 지귀(志鬼)라는 청년이 있었다. 짝사랑으로 인해 지귀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다. 이 소식은 신라전역으로 펴져나갔다. 소식을 전해들은 여왕은 모월 모일 모시에 어느 절에서 만나자 기별은 하였다. 마음이 들뜬 지귀는 일찌감치 절의 탑신 밑에서 여왕의 행차를 기다리다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나머지 잠을 설치는 등 심신의 피로가 일을 그르친 모양이었다. 여왕은 그가 잠든 모습에서 측은지심을 느껴 증표로 머리맡에 팔찌를 놓아두었다. 이윽고 잠에서 깬 그는 여왕이 다녀간 것을 알고는 사모의 정이 더욱 불타올랐고 마침내 화귀(火鬼)로 변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그때마다 여왕을 들먹이면 불이 꺼졌다고 한다. 그러자 서라벌의 대문마다에는 여왕의 화상이 나붙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처럼 여왕은 미스코리아를 뺨칠 정도의 미모를 자랑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듯 이런 여왕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 그것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으로부터 모란꽃 병풍을 받아 풀이하기를 꽃은 아름답지만 벌과 나비가 없어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다했다. 신하들이 반신반의로 봄에 씨앗을 뿌려 꽃을 피웠지만 여왕의 예언대로 향기가 없었다. 이는 당태종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왕자신을 석녀로 조롱한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던 것이다.

또 어느 해 어느 날은 영묘사 옥문지에서 개구리 떼가 사흘간 울었다. 신하와 백성들이 이상히 여겨 여왕에게 여쭙자 여왕은 필탄(弼呑)과 알천(閼川)등에게 각각 군사 1,000, 도합2,000을 주어 서쪽으로 나아가 여성의 생식기와 관련한 지역을 찾으면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니 처치하라 명하였다. 기연미연 둘은 서쪽으로 나아가 현재의 경주 건천에 이르러 주민들에게 물으니 과연 부산(富山)아래에 여근곡(女根谷)이란 지명이 있어 백제의 병사 500여명이 숨어있는 지라 이를 에워싸서 섬멸하였다. 또한 남산(금오산)에 우소(亏召)란 백제 장수가 숨어있는 것을 활로 쏘아 죽였다. 이후 백제의 병사 1,200명이 침범해 왔지만 모조리 죽였다.

분황사 3층 모전석탑. 건축 당시의 웅장한 모습이 궁금하다. 이원선 기자
분황사 3층 모전석탑. 건축 당시의 웅장한 모습이 궁금하다. 이원선 기자

일이 마무리 된 후 여왕께 내막을 묻자 여왕은?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陰部)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희다.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따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고 하였다.

여근곡의 위치는 경주터널을 지나 부산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 오른쪽 산중턱에 걸쳐 있다.

여왕이 나이가 들어 죽음에 이르자 여왕은 신하들을 불러 내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하였다. 도리천을 모르는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딥니까?”묻자 낭산(狼山)의 남쪽이다.”하였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여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여왕을 낭산 남쪽에다 장사지냈다. 그 후 10수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六天)의 제2천으로 사천왕천 위에 있다.

이렇듯 영명하고 반듯한 여인상이지만 무자식이 문제였다.

조롱을 떠나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었으며 여왕을 힘들게 했다. 따라서 어떻게든 자식을 갖고 싶었다. 이에 여왕은 용수와 용춘 두 사람 사이에서 3(처음 용춘과 결혼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에 용수와 결혼하였으나 역시 후사가 없자 다시 용춘과 결혼한다)에 걸쳐 결혼을 하는 등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특히나 친자매인 천명공주와 결혼한 용수(천명공주가 언니라면 여왕에게는 형부가 되는 것이다.)를 빼앗듯 결혼한 것은 얼마나 여왕이 자식을 원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왕의 말년인 647(선덕여왕 16)년에는 상대등으로 취임한 비담이 염종 등과 손을 잡고선 정치적 실정을 기치로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귀족의 난이라 그 규모가 상당했으며 반월성이 함락될 위기에 이른다. 이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나서서 난을 제압하고는 주동자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9족을 멸한다. 그 혼란한 와중에 여왕이 승하하며 유언으로 마지막 성골이자 사촌 여동생인 진덕((28대 왕(재위 647654). 성은 김(), 이름[]은 승만(勝曼)이다))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 이로써 신라의 성골계층의 왕위계승은 끝나고 진골(양친의 혈통이 그 어느 한쪽 또는 그 어느 일대라고 왕족이 아닌 혈통이 섞인 골품)계통이 왕위를 계승하는 시대로 접어든다.

그 첫 번째가 신라 제29대왕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천명공주와 용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로 훗날 문명부인이다). 이후 김춘추는 원교근공(遠交近攻: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쳐서 점차로 영토를 넓힘)의 정책으로 당나라와 손을 잡아 서해안 3대 상륙작전(왕건의 나주 상륙작전, 6.25당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의 하나로 당나라 수군의 기벌포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는 등 신라의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는다. 이를 바탕으로 태종무열왕 이후 신라 제30왕 문무대왕이 8년 후인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을 통일한다.

인왕상이 지키고 있지만 남쪽 감실을 제외하고는 비워져 있다. 이원선 기자
인왕상이 지키고 있지만 남쪽 감실을 제외하고는 비워져 있다. 이원선 기자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 9층 모전석탑에 담았던 뜻대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여왕의 염원 중 일부다. 신라는 삼국이 통일되자 불교의 황금기를 맞는다. 부석사, 불국사 등등 많은 절이 세워지고 의상과 원효, 부설거사 등등 이름난 고승들이 즐비하게 나타나는 황금기를 맞는다.

승함은 쇠함을 불러들인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신라도 8~9세기를 지나면서 서라벌과 지방의 호족이 득세하고 왕권이 실추되는 등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마지막에 이르러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신라의 중흥을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부왕인 제56대 경순왕은 935년 고려태조 왕건에게 신라백성의 안위를 보장으로 항복, 신라는 박혁거세(기원전 57)로부터 992, 1,000년의 역사를 무대 뒤로한다.

분황사 9층 모전석탑은 단순한 탑을 넘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처럼 만주를 호령하고 나아가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제압하고자 하는 여왕의 원대한 꿈을 품은 탑이었다. 하지만 꿈은 꿈으로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흘렸다. 꿈을 접은 지 무려 1,600여년의 시공은 뛰어 넘는 동안 모전석탑은 그 본래의 형태는 잃어버렸을지라도 여전히 제 자리에 늠름하게 서있다. 어차피 현재의 유물은 후세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후세를 위해서라도 지금 잘 보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