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길에서 만난 분황사 3층 모전석탑과 선덕여왕①
왕의 길에서 만난 분황사 3층 모전석탑과 선덕여왕①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10.1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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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선덕여왕)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으며 총명했다.
모전석탑은 건조재료가 돌로써 벽돌처럼 다듬어서 석탑을 만들었다.
석재의 물리적 변형, 이를 가장 현명하게 극복한 석조건축물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사원이다.
문화재청 사진콘테스트 선정작. 이원선 기자
문화재청 사진콘테스트 선정작. 이원선 기자

신라 제27대왕 덕만(德曼)은 시호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647년까지 16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불교의 발전과 전파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법흥왕(신라의 제23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514540)때부터 시행한 신라의 골품제도에 의한 성골((부계(父系)와 모계(母系)가 모두 순수한 왕족))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매지간으로는 천명공주가 있었으나 그녀가 여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으며 총명했기 때문이다.

당초 진평왕은 제25대 왕인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천명공주와 결혼)를 점쳤으나 덕만의 왕재 감을 알아보곤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출중한 미모로 백제의 서동(후일 백제 30대 무왕, 재위기간 600~641)이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정을 통하여 두고/ 맛둥[薯童]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는 서동요를 지어 결혼에 이르렀다는 선화공주는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그 존재가 불확실하다.

신라 최초로 여자가 왕위에 오르자 반발하는 세력이 꽤나 있어 왕의 길이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이를 극복하고자 여왕은 황룡사를 건립하는 등 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그 중의 하나가 분황사이기도 하다. 분황사는 향을 태워 황실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이다. 당시의 규모는 상당했지만 이런저런 변화를 거쳐 현재는 보광전(약사여래불을 모시는 전각)과 모전석탑이 남아 그 옛날 신국(덕업일,사방)의 전설을 품고 있다.

분황사를 창건한 여왕은 이곳에 거대한 탑을 구상하게 된다. 이는 거의 같은 시기에 축조된 황룡사 9층 목탑(높이 약 80미터. 지금의 아파트 30층 높이로 건축 당시 못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에 비견되는 대규모 공사다. 목탑의 구조와 높이가 어마어마하더라도 목조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석조공사에 비해 어려움이 적었을 것이다. 목탑이 완성되자 여왕은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며 포효했다. 하지만 목탑은 불과 풍수해에 절대적으로 취약점을 보인다. 이런 까닭에 황룡사 9층 목탑은 어느 날 화재로 전소되어 화려한 모습은 지워지고 그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석탑이 제격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3~4층 정도라면 첨성대를 축조한 전통적인 기술인 드잡이공법으로도 가능하지만 9층의 석탑건립은 이와는 다르다. 16m정도의 높이와 수 톤에 달하는 석재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비계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당시의 목재로서는 어림이 없다. 나아가 나라가 혼란한 중에 일으킨 대규모의 토건공사로 인해 야기되는 크고 작은 사고 등등은 불안한 정국과 관련하여 여왕의 정치적 입지에 더욱 부담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난제를 다소나마 해결한 것이 모전석탑이다.

모전석탑은 건조재료가 돌로써 벽돌처럼 다듬어서 석탑을 만드는 기법이다.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으로서 한국의 석탑축조 기법 중 하나로 이색적인 양식으로 정착하게 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이나 분황사 9층 모전석탑은 단지 여왕의 위상과 아름다움, 웅장함만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지러운 국운이 날로 강성하여 주변국들을 정복하고자 하는 여왕의 숨은 뜻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1층부터 차례로 일본, ,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를 새겨 넣어 언젠가는 이 9개국을 신라 밑에 모두 복속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현재 분황사 모전석탑은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여 3층으로 국보 제30(19621220일 지정)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석재로 쌓았지만 여왕의 염원과는 달리 무너진 것이다. 석재를 무너뜨리는 주요 요인으로는 물과 햇볕 그리고 세월 등등을 들 수 있다. 돌을 다루는 기술이 현재처럼 기계화되지 못했던 시절에는 돌을 자르는 기술로써 나무쐐기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석공이 정을 사용하여 알정한 간격으로 돌에다가 홈을 판 다음 나무쐐기를 박고선 물을 부었다. 물을 흠뻑 머금은 나무쐐기가 팽창을 시작하면 돌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해 갈라지는 것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그 자체도 대단하지만 물이 다른 물질과 만나면서 발휘하는 힘은 상상 그 이상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모전석탑 역시 비가 내리면 각각의 석재들이 팽창을 하고 햇빛이 비치면 수축을 하는 등,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동안 틈이 발생하고 그 틈에 먼지나 흙이 쌓인다. 잡초나 식물이 자라는 토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후 틈은 더욱 벌어지고 본래의 형태에서 뒤틀어져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거기에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억불승유정책으로 신라의 옛 도읍지였던 서라벌은 폐허로 변한다. 오죽했으면 조선 중기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 실태를 조사하자 임해전지(신라 때 임해전이 있던 자리라 해서 붙여진 명칭)에 오리와 기러기가 놀았다고 보고되었을까? 그로인해 임해전지는 안압지로 명칭이 바뀌는 비운을 맞는다.

석재의 물리적 변형, 이를 가장 현명하게 극복한 석조건축물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사원이다. 11세기경 석조로 사원을 건축한 캄보디아인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진 기후는 석조의 팽창과 수축이 극심했고 급기야 얼마 안 가 석조건물은 그 형태의 변화가 확연했던 것이다. 몇 번의 재시공 끝에 터득한 방법이 건축물 주위에 물을 항상 가두는 것으로 해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석재가 늘 물에 잠기는 방식으로 팽창만 있을 뿐 수축을 막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일정한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그 형태를 오롯이 보존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는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는 방법으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성 아래에 해자를 만들었다면 캄보디아인들은 앙코르사원이란 석조건축의 현상유지를 위해 사방으로 깊고 넓게 해자를 판 것이다.

남쪽에 있는 감실 안으로 불상이 보인다. 이원선 기자
남쪽에 있는 감실 안으로 불상이 보인다. 이원선 기자

이에 비해 분황사 9층 모전석탑은 무방비 상태로 조선시대 중기까지 용케도 버티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연의 힘에 의해 뒤틀리는 등 한없이 약해진 석탑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왜병들에 의해 허물어진다. 그 뒤 분황사의 중이 사찰의 중흥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기초 지식도 갖추지 못한 채 증개축하려다가 허물어뜨리기를 반복 하는 중에 그 실상이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해체 수리, 복원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일본인은 우리나라를 위한다고 했다지만 그들의 의중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는 캄보디아의 바이욘사원의 복원에서 확연히 들어난다. 주위에 흩어진 석재를 사전 지식도 없이 조잡하게 복원한 것이 그 예다. 바이욘사원의 석불석상은 총 54개다. 따라서 54개의 불상이 주위의 해자에 반영이 되면 108개의 부처상으로 108부처님으로 환생되는 구조로 설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를 무시하여 마구잡이로 복원한 까닭에 현재는 54개의 불상도 아니며 이 마저도 들쑥날쑥 제멋대로인 것이다. 이는 국력이 쇠퇴하여 침략을 당한 약소국가의 비애인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높이를 약16m정도로 추정하고 9층으로 추정하는 단서는 남은 석재의 양을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정확한 문서의 기록과 전달이 역사를 직시하는 핵심요소인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는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단층기단으로 되어 있다.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밑이 약 36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