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기의 ‘모텔 밀라노’
홍철기의 ‘모텔 밀라노’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0.17 18:48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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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19. 밀라노 두오모성당
2018. 04. 19. 밀라노 두오모성당

 

홍철기의 ‘모텔 밀라노’

 

두오모성당의 첨탑이 낯선 발자국을 반겨준다

성당이 성性스럽게 맞이하는 모텔

액자를 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기도하는 자세가 되고

최후의 만찬을 즐기듯 여기에 있다

 

밀라노에 간 건 비 오는 수요일 저녁

비가 오면 장화를 신어야 한다는 여자의 말에

손을 잡고 장화를 사러 온 우리

누구도 묻지 않는 질문에 답을 준비한 밤

밀라노라서, 처음이라서,

밀려드는 어색함을 끌 수 없는 밤은 깊다

 

사지 않아도 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여기, 언제나 비가 왔다

비가 오면 중독된 것처럼

비음으로 흘러나오는

밀라노

 

아, 밀라노

죄를 씻어낼 수 없어 서로의 몸에 물을 부었다

당신의 몸에서 나는 물비린내가 좋아

너무 좋아 물이 되어 흐를 것 같아

당신은,

밀라노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물속에서 물처럼 흐르다 만난 당신

서로의 벗은 몸을 어루만진다

가본 적 없어

떠날 수도 없는 이 곳

 

모텔 밀라노

 

『웹진 시인광장』 2017년 11월호 발표작

 

지난해 남편 환갑에 맞춰 자식들이 여행을 보내주었다. 14박 16일 일정, 서유럽 열네 개 나라를 돌았는데 이탈리아에서 3일 묵었다. 로컬가이드는 우리를 이른 아침부터 명품관이 늘어선 밀라노거리에 풀어놨다. 먹잇감을 코앞에 둔 짐승처럼 일행들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러나 매장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조명만 눈부셨다. '사지 않아도 산 것 같은' 아이쇼핑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 진열대의 상품을 기웃거리며 감질나는 눈요기에 만족해야했다. 밀라노의 상징과도 같은 두오모성당은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었다.

‘성당이 성性스럽게 맞이하는 모텔’이라는 도입부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액자를 보는 것만으로'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고 했는데 ‘모텔’이란 시어에서 불경스럽게 나는 신앙심보다 에로틱함이 앞선다. 성聖이 아니라 굳이 성性이라 쓴 시인의 의도가 그렇잖은가. 왜 하필이면 비 오는 수요일 저녁에 갔을까. 비가 잦은 유럽의 기후를 감안한 것일까. ‘비’와 ‘비음’ 사이에서 밀라노거리를 걷는다. 물비린내마저 좋다는 것은 ‘당신’과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겠다. ‘가본 적 없어 떠날 수도 없는’ 모텔 밀라노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