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소'
권정생의 '소'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0.10 10:44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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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9. 03. 권정생 생가
2019. 09. 29. 권정생 생가

 

권정생의 ‘소 1’

 

보릿짚 깔고

보릿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그리고

코로 숨 쉬고

 

엄마 꿈 꾼다.

아버지 꿈 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 다리.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쫙 펴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릿짚 속에서 잠이 깨면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지식산업사 2001. 06.01

 

‘소’를 읽는데 난데없이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청아한 종성이 뎅그렁뎅그렁, 영혼을 두드리다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생전의 시인이 시골 교회 종지기였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생기는 선입관일 게다. 시인은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 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더는 외롭지 않을까? 가난하지 않을까? 아프지도 않을까? 안동시 조탑마을 그의 생가에 가보면 검소란 낱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부끄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런 궁핍한 생활이 순수함을 잃지 않고 동심을 그려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장판 밑에 현금이 수북했다는 이야기, 돈이 없어 그렇게 산 게 아니란 것을 지인들은 그의 사후에 알았다고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인이 대신 해준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므로 대리만족하며 시를 읽는다. 소=나, 동일시가 된다. 보릿짚 깔고 보릿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자는 건 나이고 엄마 꿈을 꾸고 아버지 꿈을 꾸며 어깨가 튼튼해진 것도 나다. 보릿짚 속에서 잠 깬 소의 눈에서 흐르는 것도 결국 내 눈물이다. 아버지의 부재가 참을 수 없는 슬픔의 무게로 짓누르는 것 같다. 자고로 목소리 크면 이기는 세상, 그래서 다들 다짜고짜 큰소리치는 판인데 소는 먼 허공에 대고 음매~ 길게 뱉는 신호음만이 표현의 전부다. 어찌해볼 도리 없을 때 고단함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몸속 깊이 욱여넣고 사는 生, 소를 통하여 삶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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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 2019-10-14 17:42:26
커다란 눈에 긴 속눈썹
되새김을 하거나 집을 드나들 때면 정겨운 워낭소리
어린 날의 추억 한켠엔 누렁이 소가 아련하네요.

상산초옹 2019-10-12 08:16:59
가슴이 아려 오네요.
어깨에 힘줄이 튼튼하고 덩지가 산 만하면 뭐합니까. 어미 잃은 작은 존재일 뿐인 걸.
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아 짠합니다.

무철 2019-10-11 15:43:31
소박하고 고결한 영혼을 지닌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동심으로 돌아가 영혼이 순수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좋은 글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만태 2019-10-10 23:54:17
묵묵히 힘든 일을 감내하던
옛집 누렁소가 그립습니다.
들녁에 매어있다가 꼬마 주인을 보면
반가워하던 눈망울도요.
새끼를 떼서 팔려가면
몇일을 소리내어 울기도했습니다.

억센 세상을 버티는 힘의 원천.
굵직하던 네 다리의 연상도
그중 하나이지싶습니다.

국태민안 2019-10-10 18:22:04
우리집 소를 나라고 생각하고 읽으니까 더욱 슬프게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