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아교’
유홍준의 ‘아교’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0.02 11:01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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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무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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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아교’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하루도 아니고

연사흘 궂은비가 내리면

아버지는 선반 위의 아교를 내리고

불 피워 그것을 녹이셨네 세심하게

꼼꼼하게 느리게 낡은 런닝구 입고 마루 끝에 앉아

개다리소반 다리를 붙이셨다네

술 취해 돌아와 어머니랑 싸우다가

집어던진 개다리소반……

살점 떨어져나간 무릎이며 복사뼈며

어깻죽지를 감쪽같이 붙이시던 아버지, 감쪽같이

자신의 과오를 수습하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세심하게 꼼꼼하게 개다리소반을 수리하시던

아교의 교주 아버지 보고 싶네

내 뿔테안경 내 플라스틱 명찰 붙여주시던

아버지 만나 나도 이제 개종을 하고 싶다 말하고 싶네

아버지의 아교도가 되어

추적추적 비가 오는 아교도의 주일날

정확히 무언지도 모를 나의 무언가를 감쪽같이 붙이고 싶네

 

시집 『나는, 웃는다』 창작과비평. 2006.10.20.

 

할머니의 종교는 무교巫敎였다. 부뚜막과 장독대, 뒤꼍 샘가까지 할머니에게는 아주 신성한 곳이었다. 촛불 한 자루 켜놓고 손을 비비면 당신이 믿는 神께서 만사형통으로 인도해준다고 여겼다. 찬물 한 대접, 쌀 한 바가지로 해결되지 않는 우환이 생길 때면 단골무당을 불러 점을 치고 굿을 했다. 반면에 아버지의 종교는 주교酒敎였다. 한 집안에 두 종교가 대립하는 형국이니 하루도 조용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종교를 이단異端이라며 배척하길 애원했고, 아버지는 할머니의 종교가 이단이라 우겼다. 할머니가 아버지의 종교를 떼어내기 위해 몰래 굿을 하다 들켜서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쇠가죽을 끈끈하도록 고아서 말린 접착제가 아교다. 시인은 지난한 가족사를 마치 말장난하듯이 언어유희의 시작법으로 풀어나간다. ‘아교’라는 종교, 그런 종교가 있다고 믿어질 만큼 아귀가 잘 들어맞는다. 사물의 이쪽과 저쪽이 틈을 보일 때는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긴 틈마저도 이것만 믿으면 감쪽같이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교는 내가 아는 무교나 주교보다 한 수 위가 아닌가 싶다. 취중의 아버지가 집어던져서 부러뜨린 상다리가 몇이며 떨어져나간 살점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한 번도 그것들 수습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어느새 나는 주교도가 되어 교주 아버지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