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불꽃처럼 살다간 '전혜린'의 삶(1)
[인문의 창] 불꽃처럼 살다간 '전혜린'의 삶(1)
  • 장기성 기자
  • 승인 2019.10.01 17:02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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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번역서와 수필집만을 남긴 채 31세에 요절한 전혜린
그녀의 짧은 인생이 ‘신화’가 된 까닭
시대를 앞질러 간 천재 여성의 외로웠던 삶
전혜린(19343-1965)은 수필가, 번역가로 활동했는데, 서울대 총장이며 법대 재학시절 지도교수였던 신태환은 전혜린을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불렸다.
전혜린(19343-1965)은 수필가, 번역가로 활동했는데, 서울대 총장이며 법대 재학시절 지도교수였던 신태환은 전혜린을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불렸다.

전혜린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남도에서 8남매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는 서울과 신의주에서, 경기여중・고 시절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보냈다. 궁핍했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고급관리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서너 살 때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두루 읽었고 소공녀가 입었을만한 흰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아버지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에 모두 합격해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전혜린은 그런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지식욕을 키워나갔다.

1952년 열여덟 살에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는데, 입학시험에서 전혜린은 수학 성적은 0점이었으나 다른 과목 성적이 출중하여 합격했는데 입학 석차도 법대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재원이었다. 당시엔 과락(科落)제도가 있어 한 과목이라도 0점을 받으면 입학이 불가능하던 시절인데 천운이 따른 셈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입학은 하였으나, 법학은 그의 본질적 성격과 맞지 않았다. 매사의 모든 것에 일일이 울타리를 쳐서 금지하고 규정하는 냉정하고도 딱딱한 학문이 그의 뜨거운 감성에는 맞지 않았다.

뮌헨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프라우엔 성당'(Frauenkirche)의 모습이다. 위키백과
뮌헨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프라우엔 성당'(Frauenkirche)의 모습이다. 위키백과

스무 한 살이던 55년 가을, 법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홀연히 독일 뮌헨으로 떠난다. 그것도 국비유학이 아닌 자비유학이었는데, 당시에는 매우 의례적 일이었다. 그의 생에 커다란 분기점을 이루는 결심이었다. 뮌헨대학에서는 대학시절 전공했던 법철학에서 독일문학으로 옮겨 오직 문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그 해 가톨릭에 입교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의 소개로 대구출신 남성(23)과 결혼하였다. 전혜린(24)은 사실 이 남성이 독일에 올 것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두 집안 간에는 결혼 밀약이 있었기 때문에, 뒷날 그녀의 남편이 된 이 남자가 독일로 왔을 때 약혼자라는 생각보다는 남편이 와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짧은 생애에서 찬란한, 그러나 슬픈 제3기는 스무 다섯 살 되던 59년, 뮌헨대학에서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귀국 후 서울대 법대와 이화여대 강사로 있던 중, 서른 살 때에 그가 그토록 꿈꿔왔던 대학 교수(성균관대 독문학과 조교수)가 된다. 드디어 제도권의 틀 속에 진입한 것이다. 1년간의 짧은 교수생활은 그에게 자유로움보다는 틀에 박힌 속박에 불과했다. 그해 전혜린은 남편과 결혼생활 7년 만에 합의이혼을 하게 된다. 서른한 살이 되던 이듬해 1월 10일 일요일 아침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것이 전혜린 삶의 개략적 이력이다.

당시 언론이 전혜린에 주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망한 이후부터다. 그것도 사망한 직후에는 갑작스런 죽음 자체만을 비중 있게 속보로 전하다가, 한해 뒤인 66년 「동아PR문제연구소」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수필집이 출간되어 16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자마자 전혜린의 존재에 본격적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혜린은 '생의 가운데'를 번역했다. 문예출판사. 1998년
전혜린은 '생의 가운데'를 번역했다. 문예출판사. 1998년

 

동시에 그가 번역한 작품들,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도 덩달아 6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주로 여학생, 특히 이화여대생을 중심으로 읽히던 이 책은 전국적 단위의 독서열풍으로 확산되었다. 일종의 ‘신드롬’이라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전혜린 열풍은 대중 문화와 독서계를 휩쓸었다. 이런 와중에 뜻밖의 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해 8월에는 두 명의 여고생 문학소녀가 “나는 전혜린과 똑같이 고독하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동반 자살하는 일을 낳기도 했다. ‘신드롬’이 신드롬에 그치지 않고 전혜린 따라 하기로 옮겨 붙었다.

다시 전혜린이 사망한 65년 1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신문기사의 경우, 한 개인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보다 ‘전혜린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초점을 맞추어 기사화하려는 경향이 적잖았다. ‘한국일보’는 사망한 1주일 뒤인 1월 17일 기사에서 전혜린의 장례식 소식과 그가 죽기 전 상황, 사망 원인과 관련된 의문, 지인의 말, 유족의 모습 등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신춘(新春)의 여성계에 적지 않은 화제와 파문을 일게 한 소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자요, 독일문학가인 전혜린(31) 씨의 죽음이다. 지난 12일 간소하나마 장중한 장례식이 시내 남학동 25번지 전혜린 씨 친정집에서 치러졌다. 얼마 전부터 부군 김철수(30) 씨와의 불화설이 떠돌던 이 여류는 외딸 정화(7) 양을 데리고 친정집에 와 있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항간에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수면제(세코날) 과용으로 인한 사고다. 과도한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다. 자살일지도 모른다.. 등등. 커피 15잔을 마셔야 비로소 평상인과 같아질 만큼 심장이 약화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사망 전날 폭음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가정생활 뿐 아니라, 모든 일상을 현실에 적응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늘 비관하고 있었거든요” 친구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술회하며 고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서독 뮌헨대학 출신으로 ‘안네프랑크의 일기’, ‘어떤 미소’, ‘압록강은 흐른다’ 등의 역서를 낸 전혜린 씨는 점성술, 운명학에 기대어 곧잘 점을 치던 이색적인 여성이었으며, 더욱이 딸 정화 양의 장래(將來)를 기록한 쪽지가 그의 유품에서 나와 유족을 눈물겹게 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일보 기사는 사망 직후 전혜린의 죽음을, 억측과 소문을 근거로 가정 불화설, 자살설 등의 스캔들로 만들었으며, 그를 희귀하고 이색적인 여성으로 희화시켜가고 있었다. 죽음 직후에는 이런 언론의 논조가 대세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