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동 화암(눈썹바위)과 연경서원
연경동 화암(눈썹바위)과 연경서원
  • 장희자 기자
  • 승인 2019.10.03 04: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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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이 그림으로도 그리기 어려운 빼어난 절경이라 극찬, 30m로 수직의 단애 위에 또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포개져 있는 형상 , 붉고 푸른 절벽이 우뚝하게 솟아서 기이한 형상이 그림을 이룸
눈썹을 닮았다고 하여 일명 눈썹 바위라 불리우는 화암(畵巖)

화암(畵巖)은 대구시 동구 지묘동 산 80번지에 있는 하식애(河蝕崖) 바위로 동화천에 인접한 도로변에 있다. 동화천에 의해 침식되어 형성된 일종의 하식애로 자색의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읍지』에 “연경서원은 대구부에서 북쪽으로 20리 거리에 있는 화암 아래에 있다”라고 하여 화암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연경서원기」에 화암에 관해 “화암은 연경서원의 서쪽을 지켜준다. 붉고 푸른 절벽이 우뚝하게 솟아 기이한 형상을 보여 그림같이 아름다우니 ‘화암’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구읍지」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연경화암(硏經畵巖)’ 에서도 화암의 수려한 경관을 화려한 글로 잘 나타내고 있다.

눈썹바위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주변 풍광

연경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3인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매암(梅巖) 이숙량(李淑樑)[1519~1592]을 제향했던 서원이다. 연경서원은 낙성을 기준으로 1565년(명종 20)에 창건되어 대구지역 유풍(儒風)과 문풍(文風)을 이끈 대구의 수서원(首書院)이었다. 연경서원은 사액서원이자 대구지역 최초의 서원, 조선 시대 대구 유학의 중심, 퇴계 이황의 서원십영(書院十詠)에 등장하는 서원, 강학을 목적으로 세워진 서원, 퇴계 이황의 제자인 이숙량과 전경창이 서원창건의 중심인물이었다

눈썹바위에서 연경동방향으로 보이는 학봉과 행복주택아파트단지

연경서원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매판소(埋板所)를 비롯한 대략적인 터는 확인된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산 80번지에는 ‘화암(畵巖)’이라는 큰 바위절벽이 있고 그 곁에 사찰인 대원사가 있다. 대원사가 자리한 동네를 ‘서원연경’이라 하는데 서원연경 제일 안쪽에 연경서원이 있었다. 지금은 이 일대가 택지개발중이다.

눈썹바위 오른편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붕우리

연경서원은 낙성을 기준으로 1565년(명종 20)에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중건했다. 1613년(광해군 5) 사당을 건립하고 이황을 제향했다. 1622년(광해군 14)에 정구를, 1706년(숙종 32)에 정경세를 제향하였다. 한편 1635년(인조 13)에는 별도로 향현사를 건립하여 전경창, 이숙량을 제향하였다.

눈썹바위에서 지묘동 방향: 앞에 동화천이 흐르고 도약대앞 동화2교 다리가 보인다.

연경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현재까지 미복원 상태이다. 연경서원은 대구지역 5개 사액서원 중 한 곳이자, 대구지역 최초의 서원이었다. 동시에 조선 시대 대구지역의 유풍, 문풍을 이끈 대구의 수서원이었다. 따라서 연경서원은 대구지역의 유학사는 물론 인물, 문중, 전통, 문화 등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눈썹바위에서 정면방향: 동화천 건너로 화담산과 연경서원이 조성될 공공택지개발지구 내 1부지 근린공원이 보인다.

연경서원을 창설한 이숙량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할아버지는 인제현감을 지낸 이흠(李欽),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였다고 한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업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치중하였다. 천거에 의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여러 차례 부름이 있자 억지로 한번 나아가 숙배(肅拜)했는데, 이 때 선조 임금이 손수 ‘선을 쌓은 집안에 경사가 넘친다’는 뜻의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여덟 자를 하사하였다.

눈썹바위 우측 대원사: 과거에 연경서원이 있었다는 자리로 추정된다.

맏형수 임씨(林氏)가 일찍 홀로 되어 대구의 친정집에 가 있었기 때문에 대구를 자주 왕래하였다. 이즈음 대구 연경리의 화암(畫巖)이라는 곳에 매암서당(梅巖書堂)을 짓고 『심경(心經)』 공부에 몰두하였다. 1563년(명종 18)에는 서당을 개축하여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창설하였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눈썹바위

2006년 서원연경마을 일대를 포함 연경지구 148만 5㎡(45만평)이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지정되자 대구지역 24개 문중대표로 구성된 연경서원 중건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퇴계의 계획에 따라 설립되고 학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돼 대구가 영남지방의 학술문화적 중심으로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한 연경서원이 연경 공공택지개발지구 내 근린공원 1부지에 하루빨리 계획대로 복원되어 대구 유림계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지고, 학자지향(學者之鄕) 문화도시를 꿈꾸는 대구의 자존심이 회복되기를 기대해 본다.

눈썹바위 위에 자라는 소나무
동화천 건너 연경공원에서 바라본 화암과 대원사 일대 전경
안개에 쌓인 화암과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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