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27)
녹슨 철모 (27)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9.3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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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공기가 태원에게는 천 근 납덩이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성철이가 환자용 텐트에서 기어 나왔다. 태원은 자신의 모자를 힘껏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야, 성철이 내 장교 모자 던졌어. 이제 남자끼리 한 판 붙어보자, 빨리 나와 이 새끼야.”

이번에 그의 목구멍에서 토해 나온 그것은 고함이 아니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는데 오히려 그게 그 분위기에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꽤 무게가 있고 깊은 분노를 느끼게 하는 목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성철이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으스름한 달밤이어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위생병들은 물론이고 가까운 천막의 보병들도 모여들었다. 성철이가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주먹에 태원이 단숨에 나가떨어지는 광경이 연상되어 구경꾼들은 마른 침만 삼키며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성철이 태원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섰다.

“덤벼, 이 새끼야.”

태원이 허세를 부리며 양쪽 주먹을 쥐고 섰다. 그러나 성철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그 가까운 거리에서 성철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구경꾼들은 생각했다. 성철이 권투선수 출신이니까 아마추어에게 주먹 쓰기는 심하다고 생각하여 몸을 써서 그를 공격하려나 생각하였다.

“왜 이러세요? 군의관님까지 왜 이러세요?"

가까이 다가온 성철이 갑자기 울부짖으며 태원의 다리 앞에 푹 꿇어앉았다. 태원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구경꾼조차 의외의 사태에 어리둥절 놀라고 있었다.

“저는 이 부대로 전출 와서 늘 괄시받고 외롭게 살았어요. 하지만 군의관님은 한 번도 저를 욕하거나 비웃은 적이 없잖아요. 우리 부대에서 단 하나 저를 이해하는 장교였습니다."

이성철 이병이 울부짖듯 외쳤다. 태원은 처음에는 너무나 뜻밖의 사태에 놀랐지만 이내 기분이 고양되어 으스대며 떠들었다.

“야, 인마 네가 모든 장교는 다 죽인다며? 그럼 군의관은 장교도 아니라는 이야기구먼.”

짐짓 불쾌한 듯 트집을 잡으며 그의 가슴을 발로 밀어 버렸다. 일부러 뒤로 넘어진 성철은 한동안 그냥 누워 있었고 이윽고 위생병들이 그를 부축하여 천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달은 아까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숙영지에 침묵의 시간이 찾아오게 되었다.

 

공사 기간은 다 되어 가는데 계획대로 공사가 진척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매일 밤 참모 회의에 들어가 공사 이야기를 듣지만 자세한 뜻은 알 수 없고 다만 뭔가 잘 진행이 안 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사장 전방에서는 장마와 태풍 속에서 인원과 장비가 모자라 죽을 고생을 하는데 사단에서는 태평스런 교육명령을 내려보냈다. 글씨를 모르는 무학자 사병과 또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병들을 모아 사단으로 보내라는 지시였다. 군대야 명령 하나면 끝이다. 귀한 일꾼들을 하나라도 보충해야 하는 판에 오히려 보병 몇몇과 의무실의 이광희 병장이 차출되어 갔다. 이광희는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에 재학 중인 사병이었다. 대학생은 아주 귀한 자원이다. 상급부대에서 중간에 가로채어 감으로 좀처럼 이런 전방 대대급까지 내려올 인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광희는 소위 '운동권 학생' '데모쟁이'라고 하여 전방으로 오게 되었다고 태원은 전임자로부터 정보를 인수, 인계받았다. 태원은 굳이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고 광희도 태원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광희는 성실하고 무던한 성격이어서 일은 잘하지만 민첩하지 못하여 똘똘한 사병 노릇은 하지 못했다. 광희는 내무생활이나 훈련 등 기타 규정은 절대 복종하였지만 일요일 임진강에 가도 빨래가 끝나면 모두가 참여하는 다슬기잡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 그 나름대로 일의 공과 사를 구별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는 상급자인 태원까지 다슬기를 잡지만 자신의 빨래를 끝내고 나면 아무 눈치도 살피지 않고 유유히 강심으로 헤엄쳐 가며 놀았다. 그리고 반대편 강둑까지 건너가기도 했다. 태원은 저놈이 저러다가 이북으로 달아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속으로 조바심을 칠 때도 있었고 또 힘이 빠져 돌아오다 빠져 죽지나 않을까 염려가 될 때도 있었지만 녀석은 그렇게 헤엄을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녀석은 항상 싱글싱글 웃으며 헤엄치니 이 짓이 수동적인 반항인지 아니면 다슬기잡이는 소질이 없다는 표시인지 아무도 그 속내를 몰랐다. 군대는 모두가 함께 행동해야 된다는 것이 태원의 방침이지만 광희의 행동은 참아주기로 하였다. 일요일은 그냥 쉬는 날이므로 어쩌면 모두를 두들겨 깨워 빨래하러 간다는 자체가 강제인지 몰랐다. 게다가 다슬기잡이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태원 자신도 학교 다닐 때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치로 따지고 말 안 듣고 덤벼들던 생각이 나서 그는 광희의 행동을 묵인하고 참았다. 

한 달 뒤에 한글 교육 강사로 갔던 광희가 돌아왔다. 학생으로 갔던 병사들도 귀대를 하였다. 그들 중 한두 사람은 한글을 더듬더듬 읽기도 하였지만 대개의 병사들은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라는 식으로 출발 시와 전혀 변함이 없는 채로 귀대하였다.

공사 기간이 길어지자 다른 부대에서 지원을 나왔다. 여름이 끝나면서 공사는 서서히 마감되어 가고 있었다. 태원네들이 숙영하고 있는 동산 가까이에는 포병부대가 하나 있었는데 공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포병들은 보병들을 깔봐서인지 같은 사단 소속이면서도 만나면 소가 닭 쳐다보듯 무심하게 지나치기 일쑤였다. 태원을 봐도 정면에서 딱 마주치지 않는 한 경례조차 하지 않고 피해 버리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남의 부대 병사를 잡아서 두들겨 패줄 수도 없고 더구나 딱히 그렇게 해야 할 명분도 뚜렷하지 않았다. 위생병들은 막사 한구석에 임시 쓰레기장을 만들어 음식물 찌꺼기나 다른 오물들을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따로 처리하였다. 이 쓰레기장에 아침저녁으로 포병부대 개들이 나들이를 왔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잔반을 먹기 위해서다. 태원은 저놈들을 어떻게 좀 조치할 수 없을까 궁리하였다. 의무실 고참들은 노골적으로 “저놈 한 마리 잡아 된장 바를까요?" 하고 부추기기도 하였다. 

어느 날 부대에 잔류하고 있던 공병우 상병이 봉급, 약품 그리고 기타 위생재료를 갖고 의무대 숙영지로 왔다. 공병우가 부대로 돌아갈 때 태원이 명령하였다. ‘저 개 중 한 마리 갖고 가라’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공병우는 난생 처음 해 본 도둑질이라 가슴이 떨려 죽을 뻔했단다. 군복 윗도리 속에 강아지를 품고 산 아랫길로 내려가는데 포병부대 보초가 큰소리를 외치며 곧 따라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가 비무장지대에 파견 나가 G.P에서 근무할 때 북괴군과 처음 마주쳤을 때 보다 더 큰 공포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면 더 의심받을 것 같아 천천히 산을 내려 오자니 등골에서 더운 땀과 식은땀이 섞여 흥건하게 흘러내리더란다. 그리고 신작로에 내려와서 버스 종점까지는 죽을 힘을 다하여 뛰었다고 한다. 나중에 부대에 돌아와서 보니 한쪽 군화의 뒤축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부대까지 떨면서 왔다는 것이다.

 

쪄 죽을 것 같은 더위와 긴 장마 그리고 태풍 속에서도 공사는 진행되었고 젊고 패기 있는 병사들은 큰 사고 없이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그들은 올 때와 같이 완전군장을 하고 같은 길로 도보 행군하여 돌아왔다. 그 행군 모습은 태원이 처음 올 때 본 것과 똑같았다. 그때는 태원이 구경꾼이었지만 지금은 주인공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하는 군인들을 보면 태원은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다. 벚꽃이나 개나리는 낱낱으로 보면 별로 예쁜 축에 들지 못하는 꽃이다. 그러나 그 꽃들이 한꺼번에 모여 피어나면 큰 감동을 준다. 아프리카 사자들의 행렬, 물소들의 긴 행렬, 미국 버펄로들의 행렬 같은 모습 또한 그런 감동을 준다.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행군하는 전방 병사들을 보면 눈물이 났다. 뿌듯한 기쁨을 느꼈다. 태원은 그 속에 자신이 섞여 있다는 것이 더없이 황홀했다. 

부대가 가까워지자 뜻밖의 사람들이 길가에 줄서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온 동네 상인들과 주민들이 마중 나온 것이다. 그동안 잔류해 있던 자대 병력도 있었다. 박수를 치는 사람, 만세를 부르는 사람 등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격려의 감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작은 부대라 군악대는 없었지만 자연의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승리의 군대로서 모두들 가슴을 펴고 그들의 본부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