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의 ‘소사 가는 길, 잠시’
신용목의 ‘소사 가는 길, 잠시’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1.21 17:3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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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동성로 거리
2019. 10. 10. 동성로 거리

 

신용목의 ‘소사 가는 길, 잠시’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04-07-30

 

단산지 둘레길이다. 건듯 부는 바람에 홍단풍이 너울춤을 춘다. 불쑥, 굉음을 흘리며 질주하는 전투기가 거대한 물고기 같다. 공항 근처에 산다는 것은 날마다 소리전쟁을 치르는 일. 견디는 것도 전쟁이라면 이 또한 전쟁이겠다. 여기로 이사 오기 전에는 몰랐던, 나와는 무관한 줄 알았던 고통이다. 극기 체험하는 마음으로 역지사지를 배운다. 와중에 무슨 촌스러운 무의식인지 귀를 틀어막으면서도 눈은 하늘을 향한다. 이따금 여객기의 힘찬 이륙을 보며 기분만으로 비행기를 탄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로 가는지, 쓸데없는 궁금증의 궁리에 빠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내 머리 위로 날고,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누군가를 그려보는 오후가 너무 많다.

피하면 우연이고 안 피하면 운명이라 하던가. 우연한 겹침이 쌓여 인연이 되는 법.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만 그럴까.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낯선 세계 속으로 스민다. 낯섦과 낯익음이 뒤엉킨 정점에서 의도치 않게 하나가 된다. 얇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말 없는 소통이 겹치고 겹치다 만나는 우리, 이보다 더 복잡한 감정은 없겠다.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에 갇힌다. 햇살과 비듬, 직유 뒤의 은유가 매력적이다. ‘햇살’은 생성, ‘비듬’은 소멸. 희망과 절망이 맞물려 길항한다. 어쨌거나 겹친다는 말 참 좋다. 크고 나쁜 인연과 작고 좋은 인연이 뒤섞여 진정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패러다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