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옛 과거 길을 걷다
'문경새재' 옛 과거 길을 걷다
  • 윤필태 기자
  • 승인 2019.09.2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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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鳥嶺)로 역사적 흔적도 많아....
문경새재 과거 길 표지석
문경새재 과거 길 표지석

경상북도 문경은 문경새재를 가장 먼저 떠오르게 한다. 옛날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현재도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어 한해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 있는 길이다.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곡관, 제3관을 조령관으로 부르며 '새재'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새도 쉬어 넘는 고개 조령[鳥嶺], 새로 난 고개 새[新]재, 그리고 억새[새]가 무성한 고개 등인데 그 중에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의 순우리말로 한자로 조령(鳥嶺)이라고 지금까지 불러지고 있다.

문경새재는 과거를 보러 한양 길에 오르던 영남의 선비들이 장원 급제의 희망을 안고 넘던 장원급제 길이자 보부상들이 지역 산물을 전했던 고개였다. 한양과 동래(지금의 부산)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좌로는 추풍령이, 우로는 죽령과 함께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중요한 육로였고 영남의 선비들은 과거를 보러 갈 때에 유독 문경새재로만 가려고 했던 것은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진다고 했고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 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한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영남이란 명칭도 고개[嶺]의 남쪽에 있다는 뜻에서 왔으며 당시 과거는 젊은 선비들이 입신양명하는 요긴한 통로였기네 이 길을 과거 길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선비상
선비상

문경 새재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선비 상과 문경새재 옛길 보존 기념비가 있으며 선비 상은 전통사회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지성과 인격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미래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한국인을 상징하고 있다. 선비상을 중심으로 전면에 둥근 광장을 조성하고 둥근 면의 좌우 6면의 부조에는 선비와 관련된 전통시를 함께 설치해 놓고 있다.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
아리랑 기념비
아리랑 기념비
옛길 기념비
문경새재 옛길 기념비

선비상을 지나면 옛길에 관련된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된 옛길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 앞에는 문경새재를 상징하는 기념비와 아리랑기념비 등, 문화유적들이 많은데 특히, 문경새재 아리랑비를 비롯한 돌에 새긴 각 지방의 전통 아리랑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자기 지방의 아리랑 앞에서 흥얼거리며 얘향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주흘관 옛 모습
주흘관 옛 모습
공사중인 주흘관
공사중인 주흘관

제1관문에 발을 딛고

문경새재 과거길이라고 쓴 커다란 바위를 지나서 500m 정도 걸어가면 주흘관이 있는데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관문으로 청운의 꿈을 품은 영남의 선비들을 비롯한 길손들이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또한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이 남아있는 관문으로 현재는 전면 수리 중에 있다.

타임캡슐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 광장

영남 제1관문을 나서면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 광장이 있으며 이 광장은 400년 후 500주년 되는 해인 2396년 10월23일에 개봉하여 후손들에게 현재의 생활, 문화, 풍습 등 삶의 표본을 보여 주고 있다. 100품목 475종으로 분류 선정하여 첨성대형 타임캡슐에 담아 유서 깊은 영남 제1문인 주흘관 뒤 지하 6M에 매설해 두었다.

지름틀 바위
지름틀 바위

1관문에서 길을 따라 드라마 세트장을 지나면 기름을 짜는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지름틀 바위가 있다.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의 사투리로 기름틀이 누름틀과 받침틀로 구성되어 있어 이 바위가 기름틀의 누름틀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름틀 바위라고 한다.

원 터
원터

지름틀 바위에서 10여분 거리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원 터가 있다. 주막촌이 일반 백성이 운영하는 사설 주막이었다면 조령 원터는 출장 온 관리들을 위해서 나라에서 정해준 숙박터이다 . 공무로 다니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전쟁 시에는 군막으로 사용했던 곳이며 사각형 터에 긴 돌들로 튼튼하게 담을 둘렀으며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많은 길손들이 오고 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새재 내에 는 동화원, 조령원 ,신혜원 등 3개의 원터가 있다.

관찰사와 현감들의 송덕비
관찰사와 현감들의 송덕비
홍로영 현감의 철비
홍로영 현감의 철비

새재 내에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관찰사나 현감들의 송덕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석재가 아닌 철로 만든 홍로영 현감의 철비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이 철비는 1824년에서 1827년 까지 문경 현감을 역임한 홍로영의 비석으로 1826(순조26)에 건립된 것으로 주물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돌 대신 무쇠로 만든 보기 드문 비석이다.

무주바위
무주바위

제1휴게소 옆에는 아무나 올라서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주인 없는 바위라 해서 이름이 붙여진 무주바위가 있다.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가 준비되어 있어 길손들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 만큼의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 한다. 새재 골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바위 위에 앉으면 아름다운 조령산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마당바위
마당바위

무주바위를 지나 도로 좌측에 타원형으로 된 폭이 약5M 짧은 폭이 약 4M 된 마당바위가 있는데 지금은 새재를 찾는 많은 관광객의 쉼터이지만 옛날에는 도적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도 하였던 곳이다.

주막
주막

새재 중간쯤에는 주막이 있는데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 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 달래며 여독을 풀며 서로의 정을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이 주막을 조국 순례보도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을 되새겨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주막 주변에는 하룻밤 묵어가던 길손들이 써 놓은 시들이 꽤 많이 있다. 새재를 넘어가면서 촌가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나그네들끼리 시 한 수 지으면서 서로의 실력을 가늠해 보던 그런 밤이 아니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기도굴 입구
기도굴 입구
기도굴 내부 모습
기도굴 내부 모습

큰 길에서 30m정도 산길을 올라가면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숨어서 기도하던 기도굴이 있으며 굴 속에는 그 당시 신자들이 기도하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예수상과 성모상, 작은 제대가 놓여 있으며  높이가 1m도 되지 못해 몸을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없다.

귀틀집
귀틀집

귀틀집은 주로 산악지대에서 사용 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물정(井)자 모양이 되고 방틀 집, 말집, 목채 집, 틀목 집, 투방 집 혹은 정한식(井韓式) 집이라고도 한다.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 ‘나무를 쌓아올려 집을 짓는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시대에 많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귀틀집이 문경새재 주흘산 등산로 변에 남아 있었으며 현재 을릉도 나리분지에 남아 있는 귀틀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교귀정
교귀정

교귀장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아 떠나가는 관찰사와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 하던 교인처(交印處)로 1470년경(성종초)에 설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 의병 전쟁 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6월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교인식 재현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길을 가로질러 허리를 깊숙이 굽힌 소나무는 누구에게나 인사를 하고 있는 듯하다.

꾸구리 바위
꾸구리 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하며 젊은 새댁이나 아가씨가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산불됴심 표지석
산불됴심 표지석

새재 내에는 ‘산불됴심’이라고 새겨진 자연석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순수 한글 표기의 귀한 비석이며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이기도 하다.투박하고 좀 모자란 것 같아 정겹다.

소원성취탑
소원성취탑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 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 급제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곡관
조곡관

제2관문에 도착하여

조곡관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조 25년 왜란이 일어난 후에는 충주에 사는 신충원이 이곳에서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이끌던 신립 장군은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친 후 대패하여 처참한 죽음을 맞고 왜군은 한양까지 직행하게 되는데 2년 후인 1594년 문경새재에 처음으로 관문과 성곽이 축성되었는데 지금의 제2관인 조곡관이다.

새재 아리랑 비
새재 아리랑 비

제2관문을 지나면 가까운 거리에 문경아리랑 비가 있는데, 특이한 점은 누구나 버튼을 누르면 구성진 가락의 문경 아리랑을 들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문경새재는 조상들의 숱한 사연과 돌덩이 같은 역사의 슬픔이 박혀 있으며 이 길은 우리 조상들의 삶의 고비 고비가 서린 온기 있는 길이기에 그래서 이 길 위의 사람들이 한스럽게 부르던 문경새재 아리랑이 지금도 불러지고 있는 것이다.

바위굴 모습
바위굴 모습

문경새재 아리랑 비를 지나 몇 걸음을 더하면 바위굴이 있는데,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서 만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자 아비 없는 자식이란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후 아이는 아비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던 중 어느 깊은 산골 주막에서 선비가 “어하 빗줄기가 마치 새재우 같구나! ” 하므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인지 물어본 후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를 해 부자지간임을 알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청춘 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시가 있는 과거 길
한시가 있는 옛길
옛길의 한시
옛길의 한시

조선시대 선현들은 문경새재를 넘나들면서 한시들을 감상할 수 있는 옛길로 한 구절 한 구절 마다 문경새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조령관
조령관

제3관문에 도착하고

조령관은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연풍면의 경계다. 홍예문과 누각 그리고 좌우에 석성 [135m]이 둘러쳐져 있고 주변은 넓은 공원이다.

젊은 선비의 석상, 문경새재의 위치를 볼 수 있는 조형물도 있다. 넓은 야생화 밭과 울울창창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생태 역사교육장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금의환향길
금의환향길

금의환향길로 문경의 지명은 원래 문희(聞喜)였으나 훗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경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당시 과거시험은 수 천대 일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어려워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에 올라가면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과 바람이 선비들을 이 길로 불러들였고 책 바위 앞에서 장원급제의 소원을 빌어 급제한 선비들이 의기양양하게 이 길을 통해 금의환향하던 길이다.

책바위
책바위

‘책바위’라는 돌무덤은 금의환향길 돌무더기로 이곳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조령관에서 조곡관 방향으로 500여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이 길을 찾던 이들의 간절함을 짐작할 수 있고 청운의 꿈을 안고 넘던 길이지만 낙방한 이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다시 이 길을 지나야 했다.

그 길에 옛날 어느 부자집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치성을 드려 어렵게 아들을 얻었으나 몸이 허약해 공부도, 일도 할 수 없어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 끝에 유명한 도인을 만나 물으니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氣運)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 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렀다고 하며 이 말을 듣고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 바위까지 날랐더니 어느새 몸이 건강해졌으며 공부도 열심히 하여 장원급제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오래전부터 과거를 보기 위해 이곳을 지나던 선비들이 책 바위 앞에서 장원급제를 빌었다고 하며 지금도 영험하다는 소문이 있어 가족의 건강과 자녀들의 성적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입시철에는 자녀의 합격을 염원하는 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낙동강 발원지 '초점'
낙동강 발원지 '초점'

낙동강 발원지에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낙동강은 그 근원이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黃池)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草蛅)에서 나오며 하나는 순흥 소백산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문경 초점은 문경새재의 옛 이름으로서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分水領)이며 낙동강의 역사적 발원지로서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걸음을 멈추면서 옛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고 옛 사람들의 삶을 담은 역사의 공간이다.

문경새재는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며 는 가족, 친구, 연인 등 다양한 형태의 동행인들과 저마다의 목적과 취향에 맞게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 선비의 정취를 따라 자연을 만끽하는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한번쯤 가봐야 할 명소이면서 옛 과거길 뿐 아니라 인근의 조령산, 주흘산으로 통하는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  등산도 즐길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관문을 복원해 조성된 옛 과거 길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과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 더욱 관문을 통과하는 맛이 있다.

길 곳곳에는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사적지도 여럿 있으며 풍부한 물과 숲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주말 나들이 장소로 적극 권하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