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26)
녹슨 철모 (26)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9.2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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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영지에 난리가 났다. 한밤중에 두 명의 병사가 탈영을 한 것이다. 취사병들이었다. 통상 취사병들은 취사 업무 외는 대개의 딴 일과가 열외였다. 그들은 일찍 자고 일찍 깨어야 밥을 할 수 있으므로 자연히 다른 병사들과는 다른 일과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또 남들보다 통제를 덜 받는 편이었다. 

이번 사건도 행방불명 한참 뒤에야 사실이 알려졌다. 통상 전방의 탈영병은 무장 탈영하여 도시로 나가거나 가끔 월북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장교들은 월북을 막기 위해 먼저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고 G.O.P 부대에 연락을 취해 철책선을 봉쇄해두었고 전 대대 병력은 강 남쪽의 인근 야산을 포위하고 조여들었다. 

매일 반바지 차림의 노동자 같던 병사들이 병기를 든 군장을 하고 나니 완전히 달라 보였다. 눈동자들도 초롱초롱하였고 언제 저 손에 삽과 괭이를 들었던가 할 정도로 그들은 군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신이 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동료를 적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휘관들은 취사병들이 무슨 큰 목적을 갖고 탈영한 게 아니고 일찍 취침한 것처럼 남들을 믿게 한 뒤에 무단으로 가까운 마을로 한잔 하러 갔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고 작전을 했다. 무단 숙소이탈병들은 부대 돌아오는 시간을 잘못 맞춰 탈영이라는 거창한 죄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즉 평소에도 자주 출입을 하다가 그날은 재수가 없어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쉬운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결과적으로 맞춘 이야기이고 긴장한 병력은 야산을 포위하여 조여 들어갔다. 탈영병들은 동료의 제보와 장교들의 짐작대로 어느 소나무를 은폐물로 삼고 그들의 앞쪽만 주시하고 앉았다가 갑자기 뒤에서 덮친 동료들에게 간단하게 체포되고 말았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처럼 취사병 소동 후 2대대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번 주역은 이성철 이병이었다. 

성철의 소대장 변 소위는 적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의심증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군에게조차도 그렇게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개인용 천막 천장에 그는 밤이면 항상 빼어 쓸 수 있게 대검을 꽂아 두고 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 인근 부대에서 DMZ에서 적들과 교전이 벌어졌을 때 앞서 지휘하던 소대장이 적탄에 쓰러졌는데 누구도 달려가 데려올 생각은 않고 다 도망을 가더라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듣고 장교들끼리 만나면 '전쟁 나면 북괴군보다 우리 애들을 더 조심해야 될 것 같아' 하는 반 농담이 오가기도 했다.

어느 날 밤중에 이성철이 대검을 들고 그 소대장의 천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찌르고 싶은 사람은 중대장도 있고 인사계도 있었지만 그날 언뜻 떠오른 사람은 소대장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성철이 급하게 일을 벌인다고 뛰어가다가 소대장의 천막 지주를 당기는 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한밤중에 줄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있긴 해도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다 넘어지는 소리는 예사롭지 않다. 

변 소위는 직감으로 이 소리가 대단한 사건의 시작임을 알았다. 그는 급하게 천장의 대검을 뽑아 들고 호각을 크게 불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대원들이 모여들고 손전등을 비추자 대검을 든 채 막 일어서고 있는 성철의 모습이 보였다. 

만약 평범한 사병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그날 밤은 전 부대가 요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은 그냥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병들은 그들의 막사로 돌아갔다. 전과자를 건드려 봤자 일이 더 커지기만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태원이 찬란한 밤별을 보다가 천막으로 들어와 병주 생각을 하며 촛불을 켜서 책을 읽고 있었다. 

태원의 여성관은 남들과는 다른 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여자들을 지적인 면에서 깔보고 멸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자들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고 안기고 싶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많지 않은 집에서 그는 혼자 열심히 책을 읽으며 자랐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이상적인 여성들을 그의 여성상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여자들에 대한 공상 역시 그런 수준이었다.

태원의 할머니는 그가 사는 도시 외곽에서 능금 과수원을 하고 있어 주말이면 자주 그곳에 갔다. 그 동네도 같은 시내라고는 하지만 사는 방식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도시의 아스팔트 속에서 태어나 군인들의 행군과 피란민들의 판잣집을 보며 학교를 다닌 그로서는 할머니 댁이 또 다른 고향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 동네는 할머니 댁 말고도 과수원이 많았다. 그는 할머니 댁을 오가며 이웃 과수원집의 딸이 시내로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주말이면 그녀와 시내에서 만나 같이 과수원 동네로 걸어가는 공상, 문학 잡지를 같이 나눠 읽고 독후감을 이야기하는 공상을 자주 하였다. 

하긴 살고 있는 동네에도 또래의 여학생들이 몇 있는데도 가까이 하지도 못하면서 불로동 고분에 앉아 하루 종일 이런 공상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공상할 때 나타나는 여학생은 대개 잘 웃고 수줍어하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진성 이씨' 들의 집성촌에서 자란 전형적인 양반집 딸이어선지 남들에게 항상 당당하였고 웬만한 남자들도 그의 어머니를 만나면 복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태원네 공장이 활발하게 돌아가는 것도 물론 그 아버지의 사업능력이 뛰어난 결과이겠지만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지휘력이 큰 공을 하고 있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부부가 사업을 열심히 하는 덕에 태원네 형제들은 경제적으로는 남 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따뜻한 가정에서 어머니의 부드러운 애정을 느낄 기회는 별로 없었다. 태원이 갖고 싶어 하는 누나에 대한 소망과 부드러운 여자, 잘 웃는 여자란 그의 어머니와는 다른 여자를 갈구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병주는 이런 점에서 태원에게 매우 적합한 여자였다.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자, 명랑한 여자, 게다가 우연히 그녀의 집도 큰 과수원과 정미소를 하고 있었다. 외적 조건으로는 마치 일부러 갖다 맞춘 듯 이병주가 태원의 공상 속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이제 조건은 갖추어졌지만 태원은 병주와 자연스런 정서적 교감을 잘 이루지 못한다. 그런 어눌한 것이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남녀의 편지가, 더구나 깊은 애정을 나눈 남자의 언어가 자신의 감정 표현은 거의 없고 늘 훈련 이야기, 병사들 이야기, 임진강 이야기를 엮는 데 머물러 있었다.

이병주는 태원을 알고 나서 너무도 색다른 세계를 느끼며 살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부모와 오빠 하나가 전부인데 어릴 때는 자주 고향에 놀러 갔다. 온 동네가 다 제령 이씨 집성촌이어서 나름대로 양반들의 질서를 갖추고 살고 있었다. 

자신의 집과 고향에서 본 남자들과 비교하면 태원은 너무도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한쪽으로 치우친 듯한 생각, 진득하게 참지 못하는 성미, 쓸데없는 절도와 정확성, 이죽대는 말투 등 이제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남성상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이색적인 면 때문에 친근감을 느낄 수가 없었고 저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삶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태원과의 만남이 계속 되면서 그 이질감에 이상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저돌적이고 화끈한 성격이 처음에는 무례하고 거칠게 느껴지다가 이제는 그런 면 또한 매력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병주의 이런 감정의 변화는 생각이 달라진 것도 있겠지만 태원이 군 입대 후에 보여준 또 다른 모습에서 못 느끼던 감정을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대학 시절 만날 때마다 세상을 욕하던 버릇도 없어졌고 만날 때 수염도 깎지 않고 적개심에 번득이던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아직 표현은 하지 않아도 의외로 그는 섬세하며 모성을 몹시도 그리워하는 여린 사람이라는 사실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임진강의 태원과 서울의 병주가 같은 밤 비슷한 시각에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의 가슴에는 서로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틋함과 그리움이 병처럼 아프게 스며들었다. 촛불 아래서 태원은 어쩐지 읽혀지지 않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날 밤 역시 위생병들과 입실 환자들은 밤늦게까지 진료한 도구를 치우고 난 뒤 잡담을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이야기의 주인공은 성철뿐이었다. 이상하게 딴 사람들은 듣고만 있었다. 태원은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이제 아예 책은 읽을 기분이 아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부대 와서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전부 개새끼들이야. 인사계 이 새끼는 회식 때 나보고는 술도 못 마시게 하고 소대장 그 새낀 왜 근무 때 나에겐 실탄을 안 주는 거야?" 

이 말들을 가만히 듣고 보니 이건 며칠 전 칼을 들고 달리던 사건에 대한 변명 같았다.

“내가 설혹 딴 부대서는 전과자라도 이 부대 와서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전부 나보다 짠밥 수도 모자라는 녀석들이 고참 노릇이나 하려고 하고 말야. 내 반드시 탈영한다. 그땐 이 부대 장교들은 모두 죽이고 간다.” 

성철은 기가 펄펄 살아 목청을 높이건만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태원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놈이 자신의 옆 텐트에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런 공갈 협박을 하고 있다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맞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참다 참다 마침내 태원은 그의 텐트를 나왔다. 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야, 이성철이 일루 나와!" 

우태원 딴은 힘차게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고 아랫도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갑자기 이야기 소리가 뚝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