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삭발((削髮)이라는 바디 랭귀지
(31) 삭발((削髮)이라는 바디 랭귀지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09.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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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외동읍 모화리(毛火里)는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이루는 7번 국도 남쪽에 있다. 이곳 ‘모화’라는 지명은 신라시대에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이 그 당시 모벌군성 성문에 이르러 계율에 따라 삭발을(毛伐)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다음, 북쪽 불국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모벌(毛伐) 혹은 모화(毛火)라고 하면서 붙여진 것이다. 불가 수행자의 삭발(削髮)은 ‘세속적인 번뇌’를 단절하는 서약(誓約)이며, 다른 종교 수행자와 차별화하는 신체적 상징이다. 예나 지금이나 머리칼을 다듬는 것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번뇌이니 그러하다.

가톨릭 여성 수도자, 수녀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추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욕망과 번뇌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봉인하는 서약이며 기도의 징표인 것이다. 동양에서 잘라서 없애는 방법이나, 서양의 감추어서 망각하려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가톨릭의 남자 수도자들 쓰는 커다란 모자, 성직자들이 머리에 위에 쓰는 둥근 모자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머리칼이 계속 자라는 특이한 동물이다. 사람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의 털은 일정하게 자라면 거기서 멈춘다. 우리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라는 머리칼을 그냥 두면 생활에 여러 가지 불편함이 생긴다. 그래서 머리칼을 자르고 다듬어 왔고, 시대에 따라서 신분에 따라서 머리 모양 달랐다.

머리를 알맞게 기르고 다듬는 것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삭발은 특정한 목적을 나타낸다. 의미를 부여하는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 신체어)이다. 삭발은 불교의 승려라는 종교적 증표일 뿐만 아니라, 군인이라는 직업군을 의미하기도 한다. 60-70년대까지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강요된 사회 제도이기도 했다. 그 당시 학교에서 두발 규정을 위반하면 가위로 움푹 표시 나게 머리칼을 잘랐다. 잘 깎아오라는 지시였으나, 다음 날 그는 승려가 된 듯 아주 빡빡 깎은 모습으로 반항했다. 어른들에게 한 방 먹이는 신체적 항변이 바로 삭발이었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부모 말씀을 듣지 않고 나돌아 다니는 한창 나이 딸에게 내리는 강제 삭발의 형벌도 있었다. 머리가 자랄 때까지 무단 외출을 하지 말고 자숙하라는 아버지의 훈계가 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되었다.

이와 같이 삭발이라는 신체어, 바디 랭귀지는 오랜 세월 동안 종교적, 사회적 목적으로 이어져 왔다. 며칠 전 정치적 목적으로 삭발이 다시 등장했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9월 초 야당의 여성 국회의원 한 두 사람이 삭발을 하자, 야당 대표까지 청와대 앞에서 삭발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청와대에서는 그러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자.” 라고 했으나, 야당은 대화가 안 되니, 삭발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야당에서 삭발을 단행하자, 여당 인사들이 삭발의 진정성을 두고 비하했다. 갑론을박하는 모두가 나라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험담의 악순환을 거듭하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불편하다.

정치적 삭발은 극단적인 충돌이다. 그 삭발에 진정성 여부를 논하는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한 걸음 물러서 보면, 삭발을 결단한 이들, 삭발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삭발하는 동기와 의도에 따라서 마음도 달라진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 남자 아이들이 단체로 삭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 반 한 친구가 백혈병 치료로 머리칼이 없어졌다. 그러자 그 친구를 배려하기 위해서 모두 삭발을 결의하고 실행한 결과라고 했다. 어른들보다 한 걸음 앞서는 아름다운 소식이었다. 삭발한 아이들은 좀 어색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날마다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사랑의 실천하는 행복감을 누렸을 것이다.

주연 배우가 연기를 위한 삭발한 것과는 다르게 정치적인 삭발을 감행한 본인들의 마음은 그리 편하기 못할 것이다. 삭발해도 그 목적이 이루어지 않는 착잡한 심정과 알 수 없는 자괴감 같은 후유증도 있을 것이다. 삭발의 결과가 그렇게 편하지 못한 것은 그 행동이 대결이며 투쟁이기 때문이다. 마음 편한 싸움은 없다. 싸움은 괴로움이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정치적 삭발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여야 정치가들이 정책 대결을 하되 상생의 길로 뭉치기 바란다. 싸움보다 양보와 협력의 미덕을 보여 주어야 강대국들에게 짓밟히지 않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