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광복] 독립 운동으로 이름 떨친 '안동 부포 마을'
[다시 보는 광복] 독립 운동으로 이름 떨친 '안동 부포 마을'
  • 이동백 기자
  • 승인 2019.09.16 14: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마을에서 15명의 독립 유공 포상자를 낸 진성 이씨 문중과 횡성 조씨, 봉화 금씨 문중
안동댐 수몰 전의 부포 마을과 부폿들  이태원 제공
안동댐 수몰 전의 부포 마을과 부폿들 이태원 제공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숱한 독립 운동가들이 나왔다. 전국 시군 단위로 독립 유공자를 헤아려 보면 대략 30여 명에 이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보기 드물게 무려 15명의 독립 유공 포상자를 낸 마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안동의 부포 마을이다.

부포 마을의 독립 운동은 조선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경북 최초로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취지의 예안통문이 돌았다. 그 통문의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부포 출신의 이만응이었다. 이명우는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던 날 ‘외로운 신하 분통함이 하늘에 사무치네. 삶과 의리, 둘을 동시에 겸할 수 어렵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정순국自靖殉國하였다. 그의 아내 권성도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부포 마을 사람들이 3⋅1 만세 운동에 참가한 것은 예안 장터와 안동 장터에서 행해진 만세 운동 현장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부포 마을 사람들은 금용문, 금용운, 이성호, 이회벽,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이었다.

특히 부포 마을의 독립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3⋅1 만세 운동을 전후로 독립 운동에 매진한 진성 이씨 문중의 이동하, 이선호와 그 집안이었다.

의병에서 계몽 운동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적인 조직인 충의사에 가담했던 이규락의 아들인 이동하는 부포 사람으로서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는 퇴계 종가를 도와서 보문의숙을 설립하여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 운동에도 앞장섰다. 이동하의 아우 이경식은 장진홍, 이원기, 이원록 등과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경식의 딸 이병희는 종연방적에서 노동 운동을 전개하고 1940년에는 북경으로 망명, 이육사와 같이 의열단원으로 활약하다가 처녀의 몸으로 북경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병하의 종손녀 이효정 또한 항일 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이선호는 1925년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순종 인산 당일에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1929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펼쳐 나가던 중 수상 관저를 습격한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동생 이면호와 함께 1933년 메이데이 기념 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선호의 부친 이중진은 예안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사회 운동을 펼쳤다. 이밖에 이 마을 출신으로 독립 대열에 선 사람으로 이원혁과 이원태를 들 수 있다. 이원혁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서울지회와 본부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광주 학생 운동 진상 규명과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신간회가 주도한 조선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고, 광주 학생 운동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한 죄로 검거되어 징역을 살았다. 이원태는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징역을 살았다. 1925년 김창숙이 몽골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을 모은 일로 6천여 명의 유림이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의 길로 나선 부포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횡성 조씨와 봉화 금씨 문중 사람들이 다소 가세하였다. 이 마을 독립 운동가 가운데 국가로부터 포상이 추서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금용문, 이경식, 이동하, 이명우⋅권성 부부, 이병희, 이선호, 이성호, 이원태, 이원혁, 이효정,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 15명이다.

이선호의 아들 이원정(86) 씨는 “불행하게도 혼돈했던 해방 정국에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며 이데올로기의 갈등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른 안타까운 일도 있었으나, 우리 부포는 애국혼이 살아 숨 쉬는 충렬의 마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부포 마을 가름골의 현재 모습  이동백 기자
부포 마을 가름골의 현재 모습 이동백 기자

부포 마을은 안동시 예산면에 속한 자연 부락이다. 부포는 낙동강의 범람원에 형성된 마을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예부터 수향壽鄕이라 불리던 곳이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거의 물에 잠기면서 백여 호가 넘던 주민들 대부분이 떠나고, 지금은 20여 호가 댐 주변인 호소골, 가름골로 옮겨 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울망정 부포 마을이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