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25)
녹슨 철모 (25)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9.1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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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가 우태원을 면회하러 왔다. 태원의 숙영지는 하루에 몇 대 오지 않은 버스 종점에 내려서 또 한참 걸어 임진강이 보이는 곳까지 와야 되는 아주 외딴 지역에 있었다. 아무것도 볼 것도 없는 깡촌이다. 소수 주민 외는 태원 부대 군인뿐이어서 태원은 그녀에게 아예 면회 따위는 오지 말라고 당부해둔 터였다. 그런데 이병주가 나타난 것이다. 

태원은 깜짝 놀랐다. 서울에서는 손만 잡아도 얼굴을 붉히고 첫 키스 후에는 쑥스러워 한동안 만나기조차 꺼려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가 이런 곳까지 왔다. 다행히 조그마한 시골집이 몇 채 있어 그녀가 쉴 수 있는 곳은 있었다. 그 집은 한때 그가 방을 빌린 집이기도 했던 곳이다. 국군군의학교에서 임관식 때 정복 차림의 그를 보았고 청량리에서 떠나올 때는 전투복 차림이었지만 버스 속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군복 차림을 본 셈이다.

"생각보다 어울리네. 멋져 보여요.” 

그녀는 한참 쳐다보았다. 태원은 이어 나갈 말이 별로 없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 

고작 이렇게 메마른 인사를 했다. 서로 어색하게 앉아 바라보았다. 병주는 그의 모자를 들고 냄새를 맡았다. 태원은 땀에 전 그의 모자가 부끄러워 빼앗으려 했다.

"야, 참 냄새가 좋은데......” 

그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태원은 가만히 있고 병주는 계속 재잘대었다. 평소와는 반대였다. 서울에서는 둘이 만나면 태원이 주로 말을 하였고 그녀는 다소곳이 듣고만 있었다. 태원의 이야기란 늘 똑같이 반복되는 내용이었다. 정치 이야기, 소설 이야기, 박정희 독재가 타도되어야 한다고 열을 올리고 다음으로는 존 스타인벡, 도스토예프스키, 손창섭, 장용하, 이호철 이야기가 나오다 다시 사상계 이야기니 하는 정말 지루하고 횡설수설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오늘 태원은 말을 잃고 병주가 떠들었다. 그녀의 기분이 이처럼 들떠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막차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태원은 시계를 흘금흘금 보는데 그 의미는 남은 시간을 알고 싶어 그런 것보다 그녀에게 ‘어떻게 하겠어?’라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식적인지 그런 행동에도 아랑곳않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막차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날은 어두워졌고 둘은 저녁을 먹은 뒤 개구리 우는 논둑에 잠시 앉았다가 지나가는 군인들의 눈총도 어색하고 모기도 극성을 부려, 오래잖아 아까 그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태원은 갑자기 성난 짐승처럼 그녀를 방바닥에 쓰러뜨려 버렸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그녀의 입술을 핥고 깨물었다. 

좀 전까지 까불대고 교태를 부리던 그녀가 조용했다. 마취라도 당한 듯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들의 입맞춤은 태원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계속되었고 그녀는 무척 수줍어하며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맞춤 다음은 결합이었다. 태원의 격렬한 몸놀림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녀의 팔이 그의 등을 안았다. 신촌에서 첫 입맞춤이 여기에서 결실을 맺게 된 셈이었다.

 

큰 병은 없었지만 매일 밤 많은 병사가 의무실을 찾았다. 주로 가벼운 외상과 감기와 설사 같은 환자였다. 그 중에서 태원을 가슴 아프게 한 병은 시멘트 독이었다. 사병들은 반바지를 입고 미장일을 하였는데 질통 사이로 시멘트 물이 흘러나와 그들의 종아리를 적셨다. 이 물을 빨리 닦아내지 않고 두면 피부에 염증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피부염은 잘 낫지도 않거니와 환자들의 고통도 심했다. 가장 좋은 예방법은 긴 옷을 입고 작업을 하는 것이지만 더워서 그것도 힘이 들었다. 

나라가 가난하여 평소 부대 안에서는 군화는 신지 못하게 하고 통일화라는 헝겊으로 된 신발을 신게 했다. 군복도 국방색 물이 바래 허옇게 변색 된 옷을 입었다. 휴가를 갈 때면 군화를 신게 하고 내무반에 외출용으로 비치된 물 안 빠진 군복을 입고 나갔다. 국군의 형편이 이런 판에 작업장에서 무슨 긴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병사들이 참고 또 참아 주는 덕에 별 불평은 없었다. 

병사들이 가장 바라는 날은 일요일이었다. 이날은 공사가 없었기 때문에 전 부대원이 쉴 수 있었다. 공사가 없으니 쉰다고는 하지만 총도 닦고 옷도 빨고 개인적으로는 바쁜 하루가 된다.

위생병들은 공사에 참여하지 않는 탓에 빨랫감도 적고 손볼 무기도 별로 없으니 이날은 정말 푹 쉴 수 있었다. 일요일은 1인당 라면 두 개씩 분배되었다. 태원과 위생병들은 각자의 빨랫감과 라면 그리고 양철 깡통까지 챙겨들고 임진강으로 간다. 태원은 위생병이든 군의관이든 모두 군인이므로 단체행동 시 규정대로 해야 한다며 줄을 맞춰 걷거나 구보로 강변까지 달려가게 하였다. 대충 빨래가 끝나면 각자 강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거나 다슬기를 줍기도 했다. 이곳 임진강은 민간인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며 군인도 다른 부대원은 오지 않으니 다슬기가 지천이었다.

깡통에 다슬기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수영 잘하는 위생병들은 임진강 건너편까지 헤엄을 치고 나머지는 강변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좀체 낮에는 딴 생각도 않던 태원이 이런 시간에는 병주를 떠올렸다. 자갈밭에 누워 하늘을 보면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웃으며 흘러갔다. 저 구름을 따라가면 그녀가 있겠지 라고 혼자 생각해보다 위생병들이 눈치라도 챌까 봐 혼자 얼굴을 붉혔다.

임진강은 남쪽에서 출발하여 북한 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는 강이다. 그리고 하류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간다. 임진왜란 때 유명해진 탓인지 임진강 하면 크고 넓은 강으로 연상이 된다. 마치 한강쯤 될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 강은 조그마한 강이다. 그렇다고 개울은 아니다. 이름보다 작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강이었다.

밤에는 주워 온 다슬기를 삶아 먹었다.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였다. 입실해 있는 환자들도 함께 자리했다. 태원은 이런 시간이 정말 즐겁고 신났다. 도시에서 태어나 학교만 다닌 탓에 ‘조선 팔도'에서 몰려온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천일야화를 듣는 기분이었다. 세계명작을 다 읽어봤어도 이런 분위기의 내용은 없었다. 고단한 보병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도 의무실의 이야기꽃은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바람은 선들하고 하늘에는 별들이 빼곡하니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였다. 임진강의 밤과 낮은 이토록 차이가 심했다. 입실한 환자 중에 성철이라는 보병이 있었다. 나이보다 계급이 낮아 물었다.

“성철이 너는 왜 아직 이병이냐?” 

태원이 싱겁게 물었다.

“그동안 수양을 좀 하고 오느라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녀석은 얼버무렸다. 영문을 잘 모르는 태원이 눈치도 없이 다시 물었다.

“네가 무슨 도사냐? 어디서 도를 닦았다는 거야? 계룡산, 태백산?” 

반은 농조로 말하자 성철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다.

"제가 입대 전에는 밴텀급 권투 전남 대표선수였습니다. 프로로 조금 뛰다가 마음대로 잘 안 되어 형들과 어울렸어요.” 

태원은 그가 말하는 형들이 누군지도 몰랐다.

"말이 프로였지 오픈게임에 몇 번 나간 정도였어요. 게다가 지방이니 돈벌이도 안 되고 또 본게임도 자주 열리지 않으니 저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지 않고 매일 술집에서 술을 펐습니다. 그러다가 조직에 있는 형들이 저에게 동생 삼자고 하더군요.” 

집도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고 운동마저 포기한 그에게는 조직이야말로 천국이었다. 형과 아우의 의리와 질서, 그리고 외모에서 풍기는 사나이의 멋, 그리고 조금씩 생기는 용돈, 그 시절이 성철에게는 잊지 못할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다가 입대했는데 이거 정말 아무리 계급사회라고 해도 너무하더라고요. 아무 이유 없이 줄빳다를 맞고 무슨 나라가 군인들에게 밥도 옳게 주지 않아 배는 고프고 옷도 모자라고 신발도 모자라고 저는 정말 실망하고 놀랐어요. 무슨 군대가 이런 곳이 어디 있습니까? 비록 건달의 세계라도 계급이 낮다고 까닭 없이 맞는 경우는 없어요. 비록 남의 것을 등쳐서라도 고참들은 우리를 먹여 살렸어요. 그런 의리 때문에 동생들은 조직에 목숨을 바쳤고요.” 

상당히 과장되고 자기중심적인 해석이지만 크게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었다. 거대한 대한민국의 군대라는 조직이 일개 시골 깡패의 눈에 깔보이는 단체라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교나 하사관들이 걸핏하면 욕하고, 몽둥이질, 매질이었어요. 알고나 맞아야지요. 잘못은 저들이 하고 맞기는 왜 우리가 맞나요?” 

그가 상관폭행죄로 ‘남한산성’(국군형무소)에 갔다 온 변명이었지만 태원으로서는 상당 부분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성철은 자신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얼굴빛을 하는 태원을 보고 매우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야, 성철이 너 화나면 나한테도 주먹질할 것 같은데?” 

태원이 농조로 말하자 성철은 태원의 가슴에 짐짓 넘어지는 흉내를 내었다.

“절대로 저는 의리를 배신하지는 않습니다. 군의관님이 저의 형님이니까 제가 오히려 보호를 합니다.” 

표정이 제법 엄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