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광복] 권기일과 권오설, 그 숭고한 독립의 얼
[다시 보는 광복] 권기일과 권오설, 그 숭고한 독립의 얼
  • 이동백 기자
  • 승인 2019.09.06 15:0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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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스스로 실천한 권기일
죽어서도 철관에 갇힌 권오설

재산을 몽땅 독립 운동에 쓴 까닭에 그 후손이 행상으로 생계를 어렵게 이어가야만 했던 독립 운동가도 있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 후에도 철관에 갇혀야만 했던 독립투사도 있다. 추산 권기일 선생과 막난 권오설 선생이 바로 이러한 생애를 산 독립 운동가들이다.

추산 권기일 선생 기념비 이동백 기자
추산 권기일 선생 기념비 이동백 기자

추산 권기일 선생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서 사근도 찰방을 지낸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추산 선생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3월경 조부모를 남겨둔 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의 통화현 합니하에 정착한 추산 선생은 경학사에 참여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그리고 1912년 이상룡과 여준을 중심으로 조직된 교육회에 참여하여 경리와 재무를 맡아보면서 전 재산을 독립 운동에 쾌척했다. 1916년에는 부민단 결성에 참여하여 한인 동포의 안정적인 정착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기여했다.

추산 선생은 1917년 12월 국내에서 통화현으로 들어오는 독립운동 자금을 받으러 갔다가 해룡현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곤욕을 치르던 중에 선생은 1918년 3월 다행히 일본 영사관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19년 한족회의 구정(區正)을 맡아 동포들을 안정시키고, 또 그들을 교육시켜 독립 전쟁에 필요한 인물로 육성하는 데 헌신했다. 그렇게 키워낸 독립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과정에서 1920년에 일본군이 동포 사회를 짓밟은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선생도 1920년 8월 15일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근처 수수밭에서 일본군에 의해 순국하였다. 선생의 나이 35세, 망명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1990년 애국장이 선생에게 추서되었다.

광복이 되던 해 9월, 추산 선생의 아들 형순 씨는 만주에서 귀국했으나, 그에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광복을 맞은 조국에서 선생의 아들은 그 부인과 함께 리어카 간장 행상으로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추산 선생의 손자 권대용(70) 씨는 “천석지기 땅을 다 팔아서 독립 운동하러 가셨기 때문에 선친은 고향으로 돌아왔을 적에는 한 평의 땅도 남아 있지 않아 고생하셨고, 나 역시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40여 명의 노비에 천석지기의 재산을 가졌던 추산 선생은 그 재산을 독립 운동에 오롯이 쏟아 부어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했다. 이로써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 운동가로 우리 독립 운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막난 권오설 선생 기적비 이동백 기자
막난 권오설 선생 기적비 이동백 기자

막난 권오설 선생은 1897년에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숙(家塾)인 남명학교와 하회 동화학교에서 수학하고, 대구고보를 거쳐 서울로 유학했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18년 전라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다가 1919년 광주 3·1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11월 원흥학술강습소를 조직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그 후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소작인회, 화성회, 화요회, 조선노동자총동맹에 가입하여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농민·노동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같은 날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석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에는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됨으로써 당시 사회주의운동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1926년 순종의 국장일을 맞아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총책임을 맡았다. 천도교 구파와 제휴를 모색하는 한편, 청년·학생 조직을 중심으로 전국 각 지방에 조직망을 건설했다. 그러나 격문 및 전단 등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8년 2월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옥사했다.

막난 권오설 선생 근영
막난 권오설 선생 근영

당시 일제는 철관에 권오설 선생의 시신을 보관해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것은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였는데, 그것도 모자라 철관에 용접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은 2008년 부인과 합장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권오설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유로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5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가일마을 남천고택의 권장(77) 씨는 “해방 후 선생 댁에는 시모와 삼동서, 그러니까 선생의 모친, 부인과 제수 둘, 그리고 조카를 합해서 다섯이 살다가 50년대에 화재를 당해 선생의 생가는 없어졌다. 요즘 양자로 들인 조카가 대구에 나가살면서 마을 뒷산에 모신 선생의 묘소를 보살피고, 작년부터 선생의 기념 사업회와 시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가마저 화재로 사라진 가일마을에는 선생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죽어서도 철관에 갇혀 80여 년을 지내온 선생, 그 선생의 기적비만 가일마을 입구에 쓸쓸히 서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역사적 복수주의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려 함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일본 전 민족에 대한 적대가 아니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과 통치로부터 탈퇴코자 함에 있다. 우리의 독립 요구는 실로 정의의 결정으로 평화의 표상인 것이다.’

한일 관계가 평탄치 못한 지금 권오설 선생의 6⋅10 만세운동 격고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