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⑪밑도 끝도 없는 농사일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⑪밑도 끝도 없는 농사일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9.04 16: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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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다 하고 죽으려면 죽을 날 없다'는 농사일, 그 정성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건 태풍이었다.

벼농사에서 모내기와 추수가 가장 큰일이지만 추수하기까지 농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린아이 돌보는 것과 흡사했다. 소평마을은 쌀미() 자가 여든여덟 번 손이 간다는 뜻을 지녔다거나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벼가 자란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삶의 현장이었다.

초여름에 모내기를 하고 사람하나 싶으면 논매기가 시작됐다. 뿌리가 활착하는 것을 사람한다라고 했다. 7월은 논매기의 달이었다. 초복 무렵 초벌매기를 하고 중복 무렵 두벌매기를 했다. 집집마다 제초기가 두 대 이상 있었다. 부부가 한 대씩 그리고 일손 도울 자녀 수 만큼이었다.

제초기는 T자형 나무의 가로 막대는 손잡이고 긴 세로 막대 끝에는 양철로 된 바퀴 형태의 제초도구가 달려있었다. 앞바퀴는 세 갈퀴가 옆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철판이 둘러 있고 뒷바퀴에는 끝이 넓적한 호미 철판이 둘러 있었다. 제초기의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밀면 갈퀴 바퀴가 물풀을 찍고 호미 바퀴가 뒤엎어서 뿌리가 얕은 물풀을 제거했다.

보통 초벌매기는 벼의 뿌리가 약해서 모내기할 때 못줄 댄 방향으로 외골치기를 했다. 두벌매기 때는 가로, 세로 방향 모두 했다. 이것을 양골치기라고 했다. 모내기 때 못줄이 제대로 잘 대졌는지 아닌지 판가름이 이때 났다. 만약 잘못 댔다면 긴 줄로 밀 때 제초기가 벼 포기 위로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제초기를 밀면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소리가 좌르륵좌르륵 났다. 마을 들판 전체가 밤에는 개구리소리로 낮에는 제초기소리로 요란했다. 제초기가 지나가면 물방개, 올챙이, 잠자리애벌레들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왕잠자리애벌레는 송사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컸다. 큰 누에처럼 생겨서 징그럽기 짝이 없었는데 우리는 이 벌레를 째빈쟁이라고 불렀다. 꼬집는 것을 째비다고 했다. 어떤 때는 그 애벌레가 다리를 물고 늘어지는 통에 논매던 사람이 기겁을 하고 논둑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어느 중학생은 영어단어 쪽지를 제초기 막대에 물을 축여서 붙이고 일하면서 외웠다. 두벌매기 때는 벼 잎이 세어서 장딴지에 비닐로 된 비료포대를 잘라서 만든 각반을 두르고 맸다.

세벌매기는 벼이삭이 패기 전, 말복과 백로 즈음에 했다. 더 이상 제초기로는 물풀이 뽑히지 않아 손으로 뽑거나 진흙 속에 묻어야했다. 여러 명이 엎드려서 좌우로 손을 휘저어 맸다. 논매기소리는 이때 부르는 노동요다. 사람이 들어간 고랑은 벼가 좌우로 뉘여 자연스럽게 바람이 들어가는 통로가 됐다. 보통 대여섯 줄마다 고랑을 냈다. 물풀은 방동사니, 붕어마름, 부레옥잠, 가래 등이었다.

가래는 줄여서 이라고도 불렀는데 야마리, 고래전, 모래골 논에 많았다. 다년생 식물로, 봄에 논을 갈면 흙속에 묻혀있던 까만 열매가 고구마처럼 줄기로 딸려 나왔다. 열매 속에 들어있는 하얀 부분을 먹으면 맛이 고소했다.

소평마을은 사진의 오른편, 전봇대 멀리 있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산은 어래산 줄기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은 사진의 오른편, 전봇대 멀리 있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산은 어래산 줄기다. 정재용 기자

논에는 개구리나 우렁이 잡아 먹으로 왜가리가 많이 날아왔는데 얼핏 보면 삼베옷 입은 농부와 구분이 안 됐다. 왜가리를 마을사람들은 백로 또는 황새라고 불렀다. 왜가리는 이 논 저 논 날아다니며 울음소리를 냈는데, 뉘가 쓸데없는 말을 하면 이를 빗대어 황새 고디 까먹는 소리라며 타박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말도 같은 의미다. 북부학교 근처의 황새마을'이라는 마을 이름도 황새가 많이 날아들어서 생긴 이름이다.

1972년부터 전국적으로 통일벼가 보급됐다. 밥맛은 아끼바리 품종에 비해 떨어지나 소출이 많아 인기가 있었다. 덕분에 1977년부터 우리나라도 쌀 자급자족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키가 작아서 가마니치기에 부적합하고 바람이 약간만 불어도 낟알이 쉬이 떨어지는 게 흠이었다.

소출을 늘리려면 퇴비가 필수적이었다. 새마을 사업의 소득증대 차원에서 마을마다 공동으로 퇴비 만들기 대회도 열렸다. 학교에서도 퇴비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보리짚단을 묶어서 등에 매고 등교했다. 이는 1972년 울산 한국비료 공장이 준공되면서 해결됐다. 당시 비료는 질소, 인산, 칼리였는데, 유안과 요소 비료를 많이 사용했다. 무슨 비료를 어느 시기에 얼마만큼 뿌리느냐가 농사의 기술이었다. 욕심에 너무 많이 뿌리면 잎만 무성하고 이삭이 늦게 나오면서 쭉정이가 많이 생겼다.

농사를 망치는 또 다른 하나는 도열병, 오갈병, 흰잎마름병 등 벼가 병이 드는 것이었다. 더위가 오래 지속 돼도, 장마가 길어져도, 비료를 너무 많이 해도 병이 들어서 수시로 약을 쳤다. 처음에는 분무기를 매고 쳤으나 경운기가 생기고부터는 긴 줄을 어깨에 메고 논으로 들어가서 좌우로 분사했다. 이때 한 사람은 반드시 커다란 고무 농약물통 곁에 서서 줄을 당겨야했는데 그 일은 보통 아내가 맡았다. 아무리 물로 희석했다지만 농약 냄새 자체가 속을 메슥거리게 하는데다 뙤약볕 아래서 거듭되는 노동에 시달리다보면 장정이라도 논둑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가난하여 영양이 부실한데도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오전 일로 끝냈다. 약 효과를 보기위해서 이슬이 마르고 나서 치고 만약 비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훗날로 미뤘다. 때때로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며 들판 전체를 살포할 때도 있었다.

농약이 나오고부터 곡수는 늘었으나 미꾸라지, 메뚜기, 개구리, 우렁이, 잠자리, 제비가 현격히 줄었다. 2차 농약 중독으로 왜가리가 죽고 천지를 모르는 제비새끼가 몰살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인명사고 났다는 소식도 가끔 뉴스를 탔다. 소먹이는 사람들은 그 너른 들판에 소 먹이 꼴 벨 곳을 못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벼꽃은 처서(處暑) 무렵에 피었다. ‘처서에 비 오면 곡수(穀數) 준다'는 속담은 한창 벼꽃이 피어 씨받이를 해야 할 철에 비가 내리면 수정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벼꽃이 피고 나면 더 이상 논매기는 안 했다.

벼 이삭이 고개를 내밀 때 먼저 꼿꼿이 머리를 쳐드는 놈이 있는데 바로 피'였다. 피는 논에 자라는 가라지로 벼와 같이 자라다가 벼가 팰 무렵부터는 속성으로, 벼보다 먼저 꽃을 피우고 추수하기 전에 씨앗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내년에 피농사'를 면하려면 농부는 아무리 바빠도 이전에 피사리를 마쳐야 했다.

피는 벼가 먹을 영양분을 가로채기 때문에 빨리 뽑아낼수록 좋으나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벼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두벌 논 맬 때쯤에는 눈에 띄었다. 벼보다 저 싱싱하게 자라 진한 녹색을 띠거나 잎맥이 은빛으로 선명하면 십중팔구 피였다. 벼는 연한 녹색에 잎맥도 희미했다. 보다 결정적인 증거는 잎혀였다. 잎을 줄기에서 벌리면 줄기에 붙어있던 부분의 벼에 하루살이 날개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잎혀이다. 벼는 잎혀가 있고 피는 없는 게 특징이었다.

1983년 10월의 소평마을 서쪽길, 멀리 도덕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1983년 10월의 소평마을 서쪽길, 멀리 도덕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이런 와중에 심심하면 동네 부역에 동원됐다. 기계천에서 큰거랑으로 물길 이끌어 오는 보 보수하기, 안강 기계간 신작로 자갈 깔기, 큰거랑 둑 무너진 데 모래가마니로 둑 쌓기 등이었다.

벼가 알이 차면 이름을 나락으로 바꿔 불렀다. 자고 새고 애지중지 가꿔서 나락이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면 참새가 구름처럼 떼로 몰려다니며 까먹었다. 참새 쫓는 일도 여간일이 아니었다. 들녘 여기저기서 "후여!" 새 쫓는 소리가 들렸다. 허수아비 정도는 우습게 알고 머리 꼭대기에 앉았다. 바람이 불면 일렁이는 깃발과 깡통소리도 있으나마나였다. 짚으로 처녀 머리채마냥 길게 땋은 채찍을 휘둘러 그 소리로 새를 쫓기도 했다. 나중에는 뻥튀기 폭발음을 내는 기계도 등장했다.

추석이 늦으면 햅쌀이 나오니, 늦으나 빠르나 추석이면 벼농사는 거의 막바지다. 그런데 무슨 심술인지 태풍은 추석 무렵에 많이 왔다. '일 다하고 죽으려면 죽을 날 없다'는 농사일, 그 정성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건 태풍이었다. 형산강 범람으로 들판이 호수를 이루고 애써 지은 나락이 물속에 잠겨있으면 마을사람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잠겨 있는 날수만큼 곡수 주는 것은 물론이고 혹여 싹이라도 나 버리면 한해 농사 헛농사였다.

물이 빠지고 나면 나락이 눕거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일일이 먼지를 씻어내고 지주를 세워 묶거나 여러 포기를 한데 묶어 서 있게 해야 했다. 그래야 나락이 마저 여물었다. 잠시 쉬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태풍이 야속하기 그지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슬비가 내려서 다소 흙먼지를 씻어준다 할지라도 먼지 타작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