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23)
녹슨 철모 (23)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9.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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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닥터 우, 페이션트가 너무 ‘히포콘드리아칼(건강염려증적)' 해, 특별한 피지칼 익삼(신체검사)은 필요가 없고 어차피 사이코 소매틱(정신신체적 장애)한 거니까. 부대 가거든 사이코 테라피(정신치료)나 해줘.”

민 교수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힐끗 보니 박 준장의 표정은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하지만 남의 집에 와서 뭐라 할 처지가 못 되므로 그냥 참는 표정이 역력했다. 문제는 부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벌어졌다.

"야! 아까 니들끼리 무슨 소리한 거야?" 

물론 민 교수가 큰 병은 없다는 말을 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었지만 큰 병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 묻는 것이었다. 아까 민 교수에게 받은 푸대접에 참모장은 화가 많이 나 있었지만 참는다. 지금은 우 대위가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다행입니다. 교수님 보기에 참모장님은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참모장님의 혈액과 소변을 미리 갔다 드렸잖습니까? 그동안 교수님이 면밀하게 그것들을 다 검사했는데 너무나 정상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다른 진찰이나 검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우 대위가 둘러대자 참모장의 기분이 약간 풀어졌다.

“하긴 의사 새끼들 돈 벌려고 쓸 때 없는 검사도 많이 하지. 그래도 그 교수는 양심적이군.” 

박 준장은 스스로 만족하면서도 또 따졌다.

“아까 너희끼리 영어로 한 이야기는 또 뭐냐?"

아까 민 교수 이야기는 '이 친구는 별 병도 없고 건강염려증 환자이다. 그러니 다른 신체검사는 필요 없고 정신치료나 해주라는 말은 그대로 전했다가는 자기를 미친놈 취급했다고 이 차는 다시 서울로 가게 되고 거기서 권총이 발사될지도 몰랐다.

"교수님 말씀이 참모장님이 워낙 군대 생활에 열중하시다가 정신적 피로가 겹치셨다며 그냥 두면 정말 병이 된다고 하시고 마음을 안정하고 푹 쉬시라는 정신휴양을 권하셨습니다.” 

우 대위는 제법 그럴싸하게 둘러대었다.

“야, 그 사람 정말 용하네. 군의관, 고마워! 그런 용한 교수를 소개해줘서.” 

박 준장은 안심이 되는 듯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야 당신이 정기적으로 나를 만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면담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나가는 거지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위에게 준장이 마음 터놓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그건 특별한 것은 아니고요. 술도 자주 마시고, 운동도 하시고, 책도 좀 보고, 남들에게 좋은 이야기도 들으며 그렇게 좀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에 참모장은 혼잣말처럼

“그럼 목사를 부를까? 매일 자기 전에 불러 성경책 읽으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듣자 우 대위는 매우 기뻤다.

“아이고 참모장님 그거 최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 좋은 분 모시고 매일 좋은 말씀 들으면 어떤 병이든 낫게 되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 대위의 본심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우 대위가 군단에 전입 와보니 부대 안에 절도 있고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었다. 이 세 가지 다른 종교가 한 사람의 참모 밑에서 지휘받고 있었다. 당시의 군종참모는 중령으로 신부였고 목사는 소령이었고 법사는 대위였다. 계급순으로 참모를 정하다 보니 신부가 군종참모가 되었다고 한다. 우 대위는 삭막한 보병부대에 성직자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 자주 이들을 찾아갔다. 항상 기대를 걸고 여기저기 가보지만 아무 곳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들은 말이 군종 성직자이지 옳은 군인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존경이 가는 그런 성직자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반거충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우 대위는 종교가 없었으니 군종장교들은 그를 만날 때마다 안심하고 딴 군종장교를 욕하였다. 옆에서 보면 다 같이 욕 얻어먹을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무실 뒷산에 법당이 있어 우 대위는 그쪽을 자주 가게 되었다. 법사 송 대위는 만나면 무조건 바둑판을 내왔다. 우 대위는 바둑에 별 취미가 없었지만 원래 불가 가르침의 시작은 이렇게 하는 것인가 하여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였다. 그러나 우 대위가 절에 열심히 갔어도 부처님 말씀은 별로 들은 게 없고 바둑만 늘어갔다. 우 대위는 그런 최 법사를 한 번도 원망해본 적은 없다. ‘불교란 원래 그런 식으로 포교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아직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아 때가 되지 않은 탓이야’ 하고 참고 또 참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부대 생활이 심심하니 법당에 가기도 하겠지만 나름대로 인간관계에서의 집착, 소유욕, 색욕 해결에 대한 목마른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최 법사는 좀처럼 그에게 그런 질문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최 법사는 고아로 자라 누나와 둘이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소위 동진 출가다. 우 대위로서는 그런 점이 그를 더 신비하고 신선하게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 보니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갑자기 군에 들어오니 순진한 탓이랄까 현실감이 떨어지는 사고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목사인 조 소령은 항상 피곤한 모습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그의 불만 중 하나는 군종참모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가 독선적이며 참모부의 예산을 제 맘대로 집행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긴 마르틴 루터 신부의 종교개혁 이래 신교와 구교가 한 번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광경을 본 일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린 양들에게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면서 목동인 성직자 자신들은 서로 미움을 불태우고 있었다. 태원은 그 목사가 얄밉던 차에 그를 괴롭힐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하느님이 주셨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그를 적극 추천하게 된 것이다.

군종참모인 신부 하 중령은 만나면 항상 하느님을 친견하는 느낌을 주었다. 침착한 행동과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보면 우 대위는 지극한 마음의 평화를 느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어쩐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보는 것 같았다. 거울 속의 미녀였다. 우 대위는 그런 모습이 싫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하느님을 닮았으니 정이 가지 않는 것이다.

참모들은 군종장교들이 다만 사병용 성직자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군단장의 종교가 무엇인가에 따라 수시로 그들의 종교도 바꾸었다. 어떤 장교들은 높은 자리의 참모들이 속 보이는 짓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모르는 순진한 소리다. 세상에 나가 보면 한때 스님을 하다가 목사가 되어 부흥회에서 통성 기도를 하는 사람도 많고, 신부 하다가 파계한 사람, 목사 하면서 간음과 도둑질하는 사람도 흔하지 않던가. 성직자 중에도 이런 하류 인생이 있는 판국에 일개 보병 장교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이 걸려 있고 그들의 보직과 진급과 관계된 신앙생활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그들에게 비록 박수는 보내지 못할지라도 돌을 던져서는 안 될 일이다. 종교에 전혀 관심도 없고 남의 이야기도 차분히 들을 줄 모르는 참모장에게 밤마다 불려가 머리맡에 앉아 떨면서 성경을 읽고 있을 군목 조 소령의 모습을 생각하니 이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참모장님,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 목사님은 소문에 성경에 조예도 깊고 남보다 신앙심도 더욱 돈독하다고 들었습니다. 매일 군목을 부르십시오.”

우 대위는 최선을 다하는 표정과 진지한 자세로 참모장에게 조언했다. 태원의 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근데 말이야 내가 볼 때 군목 그 친구 돌팔이 같아.” 

참모장은 난데없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그 친구 얼굴 한번 봐? 언제 펴져 있는 날이 있는가? 항상 우중충한 얼굴이고 하는 말 들어봐도 목사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 

참모장은 우 대위의 충정 어린 충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그렇다면 법사를 불러 불경을 읽게 만들까도 생각하였으나 참모장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지 한마디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 최소한 내가 간암은 아니라는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운동이나 열심히 하고 맛있는 음식이나 먹고 한번 지내보지.”

그들은 군단 사령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