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의 ‘죽음에 뚫은 구멍’
장옥관의 ‘죽음에 뚫은 구멍’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9.02 16:18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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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8. 26. 고향선산
2019. 08. 26. 고향 선산

 

장옥관의 ‘죽음에 뚫은 구멍’

 

벌초 간 어머니 묘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다 검게 아가리 벌린 그 구멍은 죽음에 뚫은 문, 산토끼의 집이다 하필이면 왜 그곳에 제 집을 판 것일까 젖가슴처럼 봉곳한 봉분을 파고들며 토끼는 아찔하게 검은 젖을 빨았을까 구멍을 드나든다고 죽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시는 건 더욱 아니겠지만, 죽음과 삶이 한통속, 바람벽에 달아놓은 거울처럼 구멍이 갑자기 환하다 입구에는 누군가 기다리다 돌아간 듯 잔디가 동그랗게 눌려 있다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문학동네. 2013. 03. 13.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더위가 꼬리를 내렸다.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놔도 덥다고 아우성쳤건만 어느새 열어두었던 문을 하나둘 닫기 시작했다. 새벽녘이면 발밑에 밀쳐둔 이불을 끌어당기게 된다. 요즘 인터넷 창을 열면 ‘벌초 대행’이란 글자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 ‘예초기’ 판매하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추석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난 휴일 봉무공원 산책로를 걷는데 여기저기서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음이 고요한 숲을 깨우고 풀냄새를 사방으로 풀어놓았다. 서두른 이들은 이미 깔끔히 마친 데도 있었다.

2주 전에 친정 부모님 산소 벌초를 했다. 손수 하기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올해는 마침 아들이 내려와서 동참했다. 기계를 조립하는 데만 30여 분을 소요시켰다. 눈썰미 부족이라기보다는 일 년에 한 번 만지는 물건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남편이 예초기를 짊어지고 잡풀을 깎아나가면 아들은 낫으로, 나는 갈퀴로 베인 풀을 긁어모아 가장자리로 치웠다. 늦여름 뙤약볕 아래서 비지땀 쏟으며 3박자를 맞췄더니 수월하게 끝났다. 무엇보다 짐승들의 방문 흔적이 없어서 안심하는데 노랑나비가 부모님의 영혼인 듯이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이 시를 읽다가 죽음과 주검 사이에서 잠시 멍해진다. 남의 죽음에다 구멍을 뚫다니. 미물이라고 너그럽게 보아주기엔 가슴 찢어지는 일이다. 죽음은 죽음만으로도 서러운데 어찌 죽음을 건드린단 말인가. 어머니는 죽어서도 젖을 물리는 존재, 주검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숙명처럼 가슴을 풀어놓고 젖을 빨려야 하는 사람, 설령 그렇더라도 제발 죽음만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과 삶이 한통속일지라도. 독수리가 죽은 새의 심장을 꺼내먹는다면 그 새는 두 번 죽는 일이다. 아, 나는 나 살겠다고 얼마나 많은 죽음에 신세를 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