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 화가, 금경연 화백
요절한 천재 화가, 금경연 화백
  • 방종현 기자
  • 승인 2019.08.26 16: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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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양화 도입 선각자

우리나라 서양화 도입 선각자 금경연(琴經淵) 화백(畵伯)

금경연 화백은 영양군 수비면 발리리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해발 500 고지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태백산 준령의 일월산(1200m)과 통고산 서북쪽 수양산 아래 금촌 마을로 봉화 금씨 200여 호가 300년을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마을 어귀에 약천정(藥泉亭)이란 정자가 있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친필 휘호로 걸려 있다. 금경연 화백은 1915년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마을 명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신문물이 들어오며 16km 떨어진 영양 공립 보통학교에 편입해서 공부를 하여 전교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금경연 화백 眞影
금경연 화백 眞影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전국 수재들만 들어오는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에 101의 경쟁을 뚫고 합격을 했다. 관비생(官費生)으로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특혜를 받았다. 국가 부흥을 이룬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동문수학을 했다. 특히 미술에 소질을 인정받아 미술선생에게 과외시간에 틈틈이 따로 지도를 받기도 했다.

대구 사범학교 미술부 지도교수와 오른쪽 끝 금화백
대구 사범학교 미술부 지도교수와 오른쪽 끝 금화백

 

1932년 입학하고 3학년(17) 때 제13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현 국전과 같은 급으로 양파와 능금으로 입선을 했다. 서양화에 입문하여 2년 반 만에 얻은 쾌거다. 그 후 더욱 정진하여 제14회에 대구 시가지로 입선을 하고 1937년 졸업 후 안동 중앙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1938년 제15회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신록의 풍경으로 입선을 하고 1939년에는 천재적인 예술혼이 빛을 발했다. 안동 성소병원을 모델로 그린 ‘붉은 벽돌 건물’이 제18회 조선 미전에서 ‘특선’ 을 수상했다.

조선 미전 특선작품 '붉은 벽돌 건물'
조선 미전 특선작품 '붉은 벽돌 건물'

 

그 후 1940년 하양과 경주 계림초등교사 겸 경주중학교 미술교사를 겸직해 경주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거주할 집이 없어 애 태우던 중 경주 최부자집 99칸 중 두 칸을 사용할 수 있어 미술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경주 최부자집은 100촉 전구를 사용할 수 있어 낮에는 정규 수업을 하고 야간에도 미술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금 화백은 경주에서 교사로 있으며 제1회 경주 미술 전람회를 주관하여 실행했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 후 고향 영양 수비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모시겠다는 효심으로 문교 당국에 간청하여, 영양군 수비 초등학교로 부임하여 교장을 맡았다. 해방 초기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교장으로 교사로서 역할과 미술공부도 병행해가며 예술의 혼을 태우다가 지병을 얻어, 1948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한국 서양화 화단에서 선각자로 서양화 1세대로 이인성 화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서양화단의 거성이었다. 금 화백은 생전에 조선 미술전람회 입선과 특선 6회 경상북도 연맹 도전 금상을 수상했다. 금 화백의 차남인 금태남 씨가 (대구시청 감사과장. 수성구청 총무국장 역임) 조선 미술전람회 도록을 근거로 선친(先親)의 작품을 찾아 1993년 영양군 수비면에 금경연 화백 추모 화비(追慕畵碑)를 세우고

경북최초의 추모 畵碑 (좌로부터 장호병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장. 조태영 전 영진대학 부총장. 방종현 대구 문인협회 이사. 은종일 한국 수필가협회 부 이사장
경북최초의 추모 畵碑 (좌로부터 장호병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장. 조태영 전 영진대학 부총장. 방종현 대구 문인협회 이사. 은종일 한국 수필가협회 부 이사장

 

2003년에 경상북도와 영양군의 지원으로 금경연 예술기념관을 건립하여 금 화백의 예술세계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현재 기념관에는 완성 미완성 작품 500여 점을 전시하여 각지에서 온 뜻있는 예술인들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금경연 화백 예술 기념관 좌로부터 조태영 영진대학 전 부총장. 은종일 한국 수필가협회 부이사장. 금태남 관장. 장호병 한국 수필가 협회 이사장
금경연 화백 예술 기념관 좌로부터 조태영 영진대학 전 부총장. 은종일 한국 수필가협회 부이사장. 금태남 관장. 장호병 한국 수필가 협회 이사장

 

금 화백의 차남 금태남 씨는 선친의 예술혼을 기리고 높이기 위해 격동기의 삶과 행복이라는 회고록도 출간했다. 잊혀진 서양화가 금경연 화백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과 뜻있는 예술인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미술관을 짓고, 지금 차남인 금태남 씨가 관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금경연 화백의 DNA를 물려받은 손녀 금영숙은 프랑스 국립대학에서 예술 조형학 박사학위를 받고 화단에서 활동 중이다. 금태남 씨의 외손녀 박진주도 대구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다. 금경연 화백의 고명딸인 금계영 씨는 시로 등단한 시인이며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 돌에다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도 하고 있다.

금 화백 따님 금 계영 시인이 생명을 불어 넣은 돌
금 화백 따님 금 계영 시인이 생명을 불어 넣은 돌

 

금영숙 작가의 작품, 한지 위에 먹과 아크릴 물감으로 완성했다.
손녀 금영숙 작가의 작품, 한지 위에 먹과 아크릴 물감으로 형상화했다.

 

금 시인의 두 딸인 이원순, 이원희 씨도 계명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외할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금 화백의 장남 금도춘(작고) 씨의 손자 금재성 군 또한 서울 국민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수학하며 증조할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금경연 화백의 DNA가 후손에게 전해져 후생가외(後生可畏)의 인물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스의 철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생단예장(生短藝長)이라 했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라는 뜻이다. 혹독한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는 말살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그 시절에 누구도 곁눈질조차 주지 않는 그림 예술(서양화)에 심취하여 예술 혼을 불살라 목숨과 바꾼 그의 작가정신이 그의 작품이, 한국 근대 미술사에 한축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금경연  화백 예술 기념관
금경연 화백 예술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