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광복] 삼대에 걸친 항일의 횃불, 향산 이만도 가문
[다시 보는 광복] 삼대에 걸친 항일의 횃불, 향산 이만도 가문
  • 이동백 기자
  • 승인 2019.08.22 15:5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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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명문가, 삼대에 걸쳐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를 낳은 향산 이만도 가문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향산 고택 이동백 기자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향산 고택    이동백 기자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가 편안할 때는 은혜에 보답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바치라.”

향산 이만도 선생이 남긴 말이다.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에는 을사오적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겼다는 비보를 듣고, 선생은 단식으로 결연히 일제에 항거하다가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향년 68세였다.

향산 이만도 선생은 퇴계 선생의 11대 후손으로 3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다. 선생 역시 고종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향산 선생이 일제의 침탈에 격분하여 단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친척, 제자, 동료들이 찾아와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선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찾아온 동료들에게는 일제의 야만적 탐욕을 비판하고, 제자들과는 경전을 논하면서 양심을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며느리에게는 부덕을, 손자에게는 의리를 가르쳤다.

향산 선생이 순국한 터에 세워진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 이동백 기자
향산 선생이 순국한 터에 세워진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     이동백 기자

“단식 나흘째 되던 날, 일본 경찰이 찾아와 억지로 미음을 먹이려 하자, 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크게 꾸짖으니,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일본 경찰은 실색하여 사죄하고 돌아갔다.”

정인보 선생이 비문을 짓고 김구 선생이 쓴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에 기록된 내용이다. 선생의 순국유허비는 안동시 예안면 청구마을 앞 ‘향산공원’에 서 있다. 이 공원은 선생이 순국한 집터인데, 후에 왜놈들이 집을 헐고 길을 낸 곳이다.

순국유허비 터에 핀 무궁화 이동백 기자
순국유허비 터에 핀 무궁화
이동백 기자

또 이런 일화도 남겼다. 단식하고 열흘이 되던 날, 영양의 의병장 김도현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선생이 식사하지 않으니 김도현도 빈속으로 떠나면서 “스승님, 쉬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는 191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른 뒤 영해 관어대에 나가 바다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쉬 뵙겠다’는 것은 ‘이렇게 뵙겠다’는 뜻이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은 이만도 선생의 자정순국自靖殉國을 “선생의 단식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죽음의 길인 동시에 민족과 영원히 함께 사는 길이기도 하였다”라고 평가했다.

선생의 뒤를 이어 장남인 이중업은 이미 을미사변 때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여했고, 대한광복회 활동에도 깊숙이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김창숙과 함께 주도적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그는 2차로 중국 국민당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쓰고 군자금을 모아 직접 중국으로 가던 중에 58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향산 가문의 항일 투쟁은 아들에서 끝나지 않고, 손자대에까지 이어졌다. 손자 이동흠과 이종흠 형제는 군자금 모금 운동이던 제2차 ‘유림단사건’에 관여했다. 이때 형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손서 김용환, 류동저도 선생의 항일 정신을 이었다.

한편 며느리인 김락 여사 또한 선생을 따라,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이때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양쪽 눈을 잃음으로써 11년간 앞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만 하였다. 여사의 친정 오빠 김대락 선생, 초대 국무령의 아내인 언니 김우락 여사 역시 일제에 항거한 항일투사였다.

삼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향산 이만도 가문에서는 모두 아홉 명이 국가로부터 훈장을 추서 받았다.

농암 종손인 이성원 씨는 “아홉 분의 독립운동가가 나왔고, 그 중 두 분이 자정순국하여 하계마을을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으니, 향산 가문의 독립운동은 향산 가문을 한국의 명문가로 인식시켜준 계기가 된다”라고 말했다.

후손들이 선조들의 항일 정신을 기려 세운 ‘하계마을독립운동기념비’ 이동백 기자
후손들이 선조들의 항일 정신을 기려 세운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
이동백 기자

하계마을에는 선조들의 항일 투쟁을 기려서 그 후손들이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를 세웠다. 이 비는 퇴계 선생 묘소로 올라가는 산 발치, 동암종택인 수졸당 앞에 서 있다. 하계마을에서 재 하나를 넘으면 육사 이원록 선생의 시혼이 깃들고, 항일의 얼이 스민 원촌마을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어렵게 산 데 비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은 일신의 영달은 물론 그 후손까지 부를 누리며 산다. 친일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삼대에 걸친 향산 가문의 항일 투쟁은 값지고, 그래서 존경받아 마땅하다.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