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22)
녹슨 철모 (22)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8.2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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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영 소위가 병원 뒷동산에 앉아 있다. 고향 친구이며 대학 동기생인 이춘 소위와 함께 콜라 한 병씩 들고 다정스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멀리서 보기에는 무척 다정스런 모습이었지만 이야기 내용은 분위기와 반대였다. 

유 소위가 친구를 일부러 불러내어 놓고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소위는 한동안 그녀의 기분을 생각하여 풀잎만 따면서 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 남자처럼 시원시원하던 유 소위가 아무 말이 없으니 이 소위는 답답하다. 무언가 신통찮은 일이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무거운 침묵을 이길 수 없어 먼저 말을 끄집어내었다.

"야, 바쁜데 사람 불러놓고 이건 또 무슨 경우냐?” 

이 소위는 짐짓 시비조로 말을 걸어 보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왜 간호과장 때문이야? 아니면 병원장?"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나가자 유 소위는 희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 이혼할까 봐." 

이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아니 어떤 이는 아직 약혼 상태로 알고 있는 판에 이혼이라니 이춘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왜 성격이 안 맞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이 소위가 재차 묻자 유 소위는 고개를 또 흔들었다. 그렇게 물으면서도 이춘은 자신의 질문이 별로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 소위의 남편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엘리트 장교였고 두 사람이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한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 남편은 전방 철책선 부대 GOP에 들어가 있으므로 한 달에 한 번밖에 만날 시간이 없는 형편이었다. 환경이나 시간상 둘이 성격이 안 맞느니 안 맞느니 할 시간도 없었다.

"그럼 박 중위한테 여자 생겼어?" 

혹시나 싶어 이 소위가 다시 묻자,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획하고 쳐들었다.

“남자가 생겼어, 내게.”

“뭐라고, 남자? 남자라니 무슨 남자?” 

이춘은 깜짝 놀랐다. 누굴까? 저 벽창호 같은 유 소위가 좋아한다는 남자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붙여보았다.

"그래,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야?“

유소위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말했다.

"너도 알지? 군단사령부 의무실장 우태원 대위 말이야?"

유 소위는 말문이 터지자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결혼을 했고 그 사람도 마누라가 있잖아? 군단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춘은 충격을 받아 마치 제 일처럼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내가 남편이 싫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야. 남편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헤어지려는 거야.”

“야, 치워. 난 깊이는 모르겠지만 그래 우 대위쯤은 좋아할 만한 사람이긴 해. 하지만 현실이 있잖아, 니들 서로가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잖아?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처음엔 그냥 좋아서 만났지, 시간이 가니까 그와 내가 비슷한 느낌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즉 같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재미, 그러면서 남편을 만났을 때 거짓말을 하는 재미 그러다가 점점 소설을 쓰는 재미가 생겼어.“

”야 도대체 재미라는 그게 무슨 말이야?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네.“ 

이춘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래, 정말 그래. 요즘 하루 종일 우태원만 생각이 나. 그래서 내 맘이 괴로운 거야, 남편도 떠나보내고 태원씨도 떠나보내고 어디 무인도로 훨훨 혼자 도망이나 갔으면 좋겠어. 춘이야! 너 나랑 탈영할래? 차라리 남편이 싫기라도 했으면 내 마음이 얼마나 편하겠니.”

유선영과 이춘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났다. 이날 만남은 어차피 무슨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 무슨 말이라도 털어 놓아야 되겠다는 절박한 유 소위의 외로움 같은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 태원은 헌병 대장 이광만 중령의 안압을 하루에 세 번 잰다. 새벽 식전에 한 번, 오전에 한 번 그리고 퇴근 때 한 번 재어서는 일주일에 한 번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오는 것이 태원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우 대위가 눈을 뜨면 아파트에는 이미 헌병대장 1호 차가 와서 대기하고 있다. 참모 아파트는 일반 장교 아파트와 꽤 떨어져 있어 차를 타고 가야만 했다. 아침 안압검사가 끝나면 두 사람은 겸상으로 아침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 보면 우 대위는 속으로 웃음이 나올 때가 있었다. 

전방에서는 헌병들이 제 계급과는 관계없이 모든 장교에게 무례하게 굴고 특히 위수지역을 떠나는 장교에게는 그들의 규정 위반을 트집 잡아 버스에서 내리게 하기도 해 창피를 주곤 하였다. 더구나 군의관들은 안심하고 잡고 놀려대는 그들의 노리갯감이었다. 물론 군단에서도 그런 헌병들의 기본 습성은 있었지만 이곳은 대개가 영관급 장교들이 많은 탓에 전방처럼 그런 노골적인 행동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군의관에 대해 만만하게 보는 것은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였다.

부대 문을 통과할 장교에게는 정식으로는 총을 두 손으로 잡고 받들어 총 자세의 경례구호를 외쳐야 한다. 하지만 녀석들은 한 손에 소총을 그대로 잡고 반대편 손으로 약식 거수경례를 하곤 했다. 그렇게 하찮은 대접을 받던 우 대위가 그들 대장의 차를 타고 저희 부대를 들락날락하게 되니 태도들이 달라졌다. 

특히 헌병대장이 우 대위를 깍듯이 모시라고 주의를 주니 그게 빈말이라도 말의 위력은 크다. 예를 들면 의무실에 와서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거나 겁주는 헌병이 없어진 것이다. 만나도 계급에 대한 예우를 해주었다. 하긴 그 무렵 많은 이미 군단 내 많은 장교들과 사병들이 우 대위를 좋아하게 되니 대령 참모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분위기이긴 했다.

"어이 실장, 너 서울서 대학 다녔지?" 

참모장 박 준장이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우 대위는 대답보다 저게 무슨 소린가 하고 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말이야, 소화가 안 돼. 며칠 동안 야전병원에도 가봤는데 전혀 낫지를 않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서울 가서 소화기 내과 교수에게 예약을 좀 해줘야겠어.”

참모장은 일방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끝내 버렸다. 실행하기 어려운 지시가 이어졌다. 평일에 대학병원에 가면 오래 기다려야 하고 또 남 보기도 창피하니 토요일 오후에 날짜를 잡으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정말 뭘 잘 모른다. 대학에서는 육군 준장보다 교수가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계급이 낮은 사람이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더러 일과가 끝난 오후에 남아 자신을 진찰하게 하라니 정말 현실감 없는 지시다. 게다가 우 대위는 학생 때부터 교수들하고 그다지 가깝지 않았던 터라 그로서는 정말로 실천하기 어려운 지시였다. 그러나 장군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온갖 핑계를 대고 머리를 써서 결국 일을 성사시키긴 했다.

“교수님 성함이 미국 내과 교과서 해리슨에도 나오잖습니까? 제가 그 자랑했더니 저희 부대 참모장이 교수님 같은 훌륭한 학자의 존안을 한 번 뵙는 게 소원이랍니다.” 

우 대위가 이런 요지로 말해 내과 교수에게 호감을 샀다.

의대 다닐 적에 우 대위는 교수들이란 일반 사람보다 자신들이 무척이나 잘난 줄 착각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고 인격도 미성숙한 하나의 기술자일 뿐이다. 기껏해야 자신의 전공과목 정도나 겨우 알고 있을 따름이지 그 외의 상식이나 다른 분야의 전문지식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이런 교수들은 허영을 잘 이용하여 살살 구슬리면 의외로 쉽게 이들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박 준장이 직접 찾아와서 인사를 드리고 싶어했습니다만 지금 전방에 게릴라들이 넘어와 몇 개 사단이 작전 중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제가 대신 왔습니다. 모쪼록 저의 참모장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군단 참모장은 전방에서 무장간첩 잡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직책에 있다. 부대 내에서 안살림을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일 뿐이다. 장교식당 깍두기 맛있게 담그는 방법, 부대 내 행군 간에 군기 지키기, 차량 속도 유지하기, 영내 유실수 함부로 손대는 녀석 영창 보내기 등 그런 시답잖은 일을 한다. 작은 부대라면 인사계나 주임상사가 하는 그런 일이었다. 군대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군인이라면 전부 보병으로 알기도 하고 또는 군인이라면 전부 전방 철책선 부대에서 근무하는 줄 착각하기도 한다. 더구나 장군은 모두가 많은 보병을 호령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줄 안다.

이렇게 무장간첩 침투 이야기가 조작되고, 있지도 않은 태원의 내과 교수에 대한 존경심을 날조해 겨우 어느 토요일 박 준장과 내과 민 교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박 준장은 자신이 귀빈 자격으로 진찰받는 것으로 알고, 민 교수는 전방 촌 군인 하나를 잠깐 친견해주는 기분으로 서로 ‘동상이몽’하며 마주 앉았다. 

민 교수는 그에게 침대에 누우라는 얘기도 않고 청진기도 듣지 않고 문진만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접에 박 준장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눈치였다. 이 통에 애간장 다 녹는 것은 우 대위였다. 진료실에 들어올 때 준장이 선글라스를 쓰고 들어온 것이 민 교수의 비위를 거슬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민 교수의 진찰은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