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말의 묘미 : 요지르오약
(27) 말의 묘미 : 요지르오약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08.19 09: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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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민족을 심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 하는 인식의 굴레이며, 하루 속히 극복해야 할 삶의 어두운 유산이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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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12월 하순 어느 날 집으로 연하장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없었으나 나의 주소와 이름은 분명했다. 열어보니 손글씨로 “요지르오약”이라고 쓰여 있었다. 알 수 없는 암호였다. 신혼 아내에게 자문을 구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한참만에 ‘약 오르지요!’를 거꾸로 쓴 것임을 알게 되었다. 둘 다 웃고 또 웃었다. 그 당시 담임하던 중학교 1학년 개구쟁이 한 녀석의 작품이었다. 그 절묘한 아이디어에 감탄하면서 거듭 웃었다.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반백년이 넘도록 ‘요지르오약’이라는 말은 필자에게 늘 살아있는 메아리가 되고있다. 가끔 떠올리면,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긍정 에너지가 되어 주었다. 살아오면서 알 수 없는 미묘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삶의 한계상황에 이르면, 좌절하고 절망하는 경우도 있다. ‘요지르오약’의 미소는 ‘어떤 일이 생기더라고 약이 오르지도, 절망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전해 준다. 그저 슬쩍 미소 지으며 한 걸음씩 넘어서야 한다는 교훈이 되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세상만사를 품어 안고 넘어서는’ 포월(包越, envelopment)의 지혜를 기르는 화두가 되었다.

만약 그때 그 녀석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어른들이 사용하는 평범한 인사말을 써 보냈더라면, 이미 오래 전에 잊혀졌을지 모른다. 아니면, 단순한 용기로 ‘약 오르지요!’라고, 했더라면, 피식 웃으며 그냥 흘러버렸을 것이다.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록 한결같이 생생한 것은 거꾸로 쓴 ‘요지르오약’ 그 기발한 발상, 바로 그 말의 묘미(妙味)였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그 소년도 이제 환갑의 나이에 이르렀다. 초로의 그가 이 사연을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한 마디는 오랜 세월동안 거듭 에너지를 재충전하면서 나의 삶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오늘 오전에도 아내와 함께 커피 한 잔에 ‘요지르오약’의 미소를 넣어 마셨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말의 변형이 주는 묘미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그 동기(動機)가 순수해야 한다. 담임 선생님에게 연하장을 보내려는 어린 소년의 순수한 마음이 그것이다. 막상 내용을 쓰려고 하니 쑥스러웠을 것이다. 그만 둘까? 하다가 킥 웃으며 작란을 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한 마디, 친구들끼리 가끔 사용하던 은어(隱語), ‘요지르오약’ 였다. 그 결정의 순간에 그의 얼굴에 감돌았던 그 미소가 눈에 선하다. 동기는 선하고 실행 과정은 순진무구했다.

두 번째로 말의 변형과 묘미에는 그 목적이 선(善)해야 한다. ‘요지르오약’ 연하장의 목적은 코믹하게 송구영신하라는 메시지였다. 아이들이 가끔 어깨를 툭 치며, ‘선생님!’ 한다. ‘왜?’ 하면, ‘그냥요!’ 하듯이 연하장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 ‘그 녀석, 참!’ 하면서 그냥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착한 선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말이든 육하원칙에 적합해야 한다. 같은 말을 해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쓴 한 수의 시(詩)가 생각난다. 제목은 ‘시험’이었고, 시의 내용은 ‘또!’ 한 글자였다. 육하원칙 모든 면에 부합하는 절묘한 외마디로 된 시이다. 읽는 이의 가슴에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울림이 강렬하다. 이보다 더 큰 감흥을 일으킬 수 없다.

요즘 정가(政家)에서 수시로 흘러나오는 여러 가지 말을 들어보면, 다양한 수사법을 구사하지만 살아있는 말이 되지 못한다. 의도가 선하지 못하고, 목적이 악의적(惡意的)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수사법은 오히려 말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묘한 말로 상대편을 공격하지만, 말의 묘미를 살리자 못하고 오히려 말의 시궁창이 되고 만다. 상대방을 칭찬하는듯 하지만, 그 속에 비수가 들어있는 절묘한 말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묘미 있는 말에는 삶의 활력을 증폭하는 에너지가 들어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라는 표현에는 스스로 충전하는 자기발전력이 들어있다. 누이가 좋고 매부가 좋으니, 나도 아주 좋다. 이 말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게 하는 힘이 들어있다. 이에 반대되는 표현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고약한 말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아프던 배도 씻은 듯 나아야 하지 왜 배가 아픈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민족을 심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의 굴레이며, 하루 속히 극복해야 할 삶의 어두운 유산이다. 형제자매와 사촌, 그리고 이웃사촌까지 두루 ‘품어 안고 희망 찬 미래로 넘어서는’ 포월(包越)의 심성을 길어가야 이런 말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사촌이 논을 사면 잔치를 열어주자!’ 라는 말이 생활화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