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와 꽃의 화가' 박태희 작가, "꿀맛" 같은 1인 3색의 삶
'소나무와 꽃의 화가' 박태희 작가, "꿀맛" 같은 1인 3색의 삶
  • 강효금 기자
  • 승인 2019.08.18 17: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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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을 퇴사하고 흰빛 모란에 사로잡혀 화가의 길로
수정할 수 없기에 더 생각하고 더 찬찬히
그림·사진과 요리로 기쁨 나누는 일인 삼색의 삶

 

서울 인사동 갤러리에서 만난 소나무와 꽃의 화가 박태희 화백
서울 인사동 갤러리에서 만난 소나무와 꽃의 화가 박태희 화백

 

서울 인사동 골목을 걷다 우연히 건물 벽에 내걸린 현수막 그림에 이끌려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수채화 3인3색전. 마음을 사로잡은 하얀 모란을 그린 사람은 박태희(61) 화백이었다. 갤러리 미술세계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박 화백의 모습은 청년처럼 당당하고 유쾌했다. 박태희 화백은 2005년 한국수채화 공모전에서 첫 번째 입선한 뒤 화단에 입문한 뒤로 , 6번 내리 공모전에 입상한 탄탄한 실력을 지닌 화가였다. 지금은 (사)한국수채화협회(이사장 박유미) 이사로 또 한국수채화 공모전 운영위원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는 박태희 화백에게, 그림에 대해 그리고 그림을 통해 바라본 세상살이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지울 수 없는 우리네 삶을 닮은 수채화

 

유화는 그리다 다시 수정을 하고 덧칠을 할 수 있지만 수채화는 다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아주 한정적입니다. 그러하기에 더 조심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치 살아온 궤적을 지울 수 없는 우리 인생과 같지요. 저는 수채화의 그런 매력을 좋아합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처럼, 지금 현재 제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도 수채화를 통해 얻은 지혜입니다. 그림에 대한 그리움은 오랫동안 품어 왔습니다. 그 그리움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고1 때였습니다. 그때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손'을 그리라는 숙제를 내주셨지요. 손을 데생했는데 선생님이 엄청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저희 반 전체 학생의 실기 점수를 매기게 하셨지요. '나도 화가가 될 수 있겠구나'하고 처음으로 화가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게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만큼의 용기는 없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평범한 집안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취업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마음을 접고 회사원으로 생활하다

대기업에서 회사원으로 일할 때도 전산실에서 근무하며 이상하게도 홍보 관련 일을 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표지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안서를 작성하다 보니, 당연히 사진이나 그림· 레이아웃 등의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이미지를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연하게 그림에 대한 열망을, 그와 관련된 일들을 하며 제게 부족했던 부분을 배워나갔던 셈이지요. 덕분에 퇴직한 후에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며 고생하던 중에 다시 그림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고, 그림을 선택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림은 제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유화도 배웠지만 어쩐지 마음이 수채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컴퓨터 관련 일을 하다 보니 눈이 나빠지면서 특히 기름 냄새를 맡기 힘들었던 점도 한몫했습니다.

 

(왼쪽) 박태희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백모란(오른쪽) 격조 높은 우아함을 담은 붓꽃
(왼쪽) 박태희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백모란 작품            (오른쪽) 격조 높은 우아함을 담은 붓꽃을 섬세한 붓터치로 표현한 작품

 

 

꽃의 아름다움에 빠지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카메라를 가지고 들로 산으로 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꽃밭에서 하얀 모란꽃이 피어나는 걸 발견했습니다. 단순히 하얗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그 매력에 빠져 며칠 동안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셔터를 누르며 하얀 모란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화폭에 그 백모란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그 백모란의 오묘함을 그림으로 담아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던 그 흰빛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옮기려 물감의 색깔을 이리 섞고 저리 섞어가며 색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습니다. 붉은빛과 황금빛이 조화를 이룬 수술과 암술을 하나하나 온 신경을 집중해서 그리다보면 저녁에는 거의 탈진 상태에 접어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완성된 백모란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동안의 수고는 말끔히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작업하다 보니 꽃이 제 그림의 주된 소재가 되었습니다. 꽃 중에는 붓꽃, 해바라기, 맨드라미 등도 많이 그렸습니다. 붓꽃도 오랜 시간에 걸쳐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보라와 군청, 노랑이 이루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는 충분히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빠져들게 하는 오묘함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붓꽃에서 느껴지는 우아함이 좋다고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부자가 된다며 해바라기를 구입해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표현하기 까다로운 꽃은 호박꽃입니다. 작은 솜털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그리다보면 몸은 피곤하지만 거기서 느끼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또 꽃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이지요.

 

소나무를 그리는 마음

 

저는 소나무도 좋아합니다. 소나무는 해변에 서 있는 소나무, 산에 있는 소나무, 왕릉에 서 있는 소나무 등등. 장소에 따라 소나무의 굵기도 줄기도 빛깔도 느낌도 다릅니다. 그것뿐인가요. 소나무는 그 종류도 다양하지요. 가지가 밑동에 붙어 자라는 반송도 있고, 하늘 높이 가지를 펼치고 있는 금강송도 있고, 부챗살처럼 줄기들이 아름답게 펼치고 있는 나무도 있고, 반구형의 나무도 있지요. 저는 꿈틀거리며 올라간 소나무의 선을 좋아합니다. 굽이치며 성장하는 소나무를 통해 외적 성장뿐만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생명의 은유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나무를 감상할 때, 소나무 앞에서 예를 드리고 가까이서도 보고 또 멀리서도 바라보고, 그리고 천천히 돌면서 마음에 새기고 마지막으로 모든 감각을 활짝 열고 소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을 느껴봅니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은 삼릉에서 만난 소나무입니다.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능을 지켜온 소나무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집니다. 굽이쳐 오르는 소나무의 곡선과 딱딱한 껍질에서 느껴지는 강건함이 조화를 이루며 삼릉의 소나무는 제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것을 아는 친구들이 직접 소나무 사진을 찍어 가져다 주기도 하는데, 그림이라는 것 또한 영감과 빛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라 직접 발로 뛰며 작업하지 않으면 마음에 드는 그림, 감동을 전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다.

 

뱍태희 화백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꼽은 한국수채화공모전 특선작 "꿀맛"
뱍태희 화백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꼽은 한국수채화공모전 특선작 "꿀맛"

 

사람은 또 하나의 남겨진 주제이며 세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한국수채화공모전 다섯 번째 특선 수상작품입니다. 제목을 '꿀맛'이라 붙였는데요. 더운 여름 날, 시골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께 아이스크림을 사 드렸더니, 그것을 너무 맛있게 드셨습니다. 손가락으로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입술로 가져가는 그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흘러내리던 아이스크림, 손가락을 빠시던 모습을 '꿀맛'으로 잘 구현해 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꽃과 소나무도 즐겨 그리지만 사람에 대한 시선과 애정도 여전히 제 작품세계의 또 하나의 주제입니다.

 

(위) 가장 아끼는 작품인 소나무(아래) 천년의 기상을 담은 경주 삼릉의 소나무
(위) 가장 아끼는 작품인 휘돌아 뻗어나간소나무          (아래) 천년의 기상을 담은 경주 삼릉의 소나무

 

 

사진과 요리로 나누는 작은 기쁨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진을 계속해서 찍다보니 사진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습니다. 그림으로 인해 얻어진 덤이라고 할까요. 사진은 빛과 순간이 만들어내는 색의 예술이라는 점이 매력입니다. 빠른 속도로 순간을 포착해 내는 재미에 빠져, 행사가 있을 때면 사진기를 들고 달려갑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본 지인들의 부탁으로 결혼 같은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면 촬영을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나누다보니 이제는 꽤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결혼식 사진은 인화해서 보면 재미있는 순간이 많습니다. 기쁨에 넘친 신부의 환한 모습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아버지의 대비된 모습은, 묘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 가족들이 맞절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깁니다. 사진을 건네줄 때 기뻐하는 지인들을 보며, 앞으로도 계속 사진으로 나누는 봉사도 할 계획입니다. 그 외에도 저는 손으로 하는 작업들을 좋아합니다. 칼이나 도구를 이용하는 작업들, 공예품이나 조각도 즐겨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요리도 저의 취미생활입니다. 그림이 소재를 발굴하고 사진으로 찍고, 스케치하고 채색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요리도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드는 싱싱한 재료를 구입하고, 가져와서 손질하고 소스를 만들고 섞는 과정을 거칩니다. 소스를 만들 때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가 있어야하지요. 또 그 과정 속에서 손맛, 불맛, 적절한 온도조절 등이 녹아들어야 합니다. 가끔 체육대회나 산행행사가 있을 때는 제가 만든 음식들을 싸가지고 갑니다. 친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특히 '김치'는 제가 자신있게 만들 수 있는 주종목입니다. 배추 김치부터 열무, 알타리, 얼갈이, 부추, 갓김치에 이르기까지  제가 담그는 김치 종류는 다양합니다. 그래서 행사가 있을 때면, 친구들이 으레 김치는 제가 챙겨 가는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그런 소소한 과정과 함께 하는 시간을 사랑합니다. 무언가 나눌 수 있다는 것, 내가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남은 소망

 

앞으로 친구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는 작업을 할 계획입니다. 저는 베이비부머 세대라 동기생이 많습니다. 그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한사람씩 초상화를 완성해 갈 작정입니다. 고등학교 때 찍은 사진들이라 지금은 친구들의 모습도 많이 변했지만 언젠가는 친구들의 초상화를 완성해서, 전시회도 하고 선물할 작정입니다. 꽃은 막 피기 시작할 때. 활짝 피어 있을 때, 시들 때, 그 모습이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함께 활짝 피어난 꽃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사람도 함께 가야 아름답습니다. 저는 그림을 통해 함께 가는 아름다움을 배웠고, 또 앞으로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누며 화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빛은 사물을 통과하면서 색이 변한다. 박태희 화백의 그림은 그런 그의 모습을 닮아 더 순수하게 더 깊이 우리 마음을 울리는지도 모른다. ‘꽃과 소나무의 화가’ 박태희 화백이 앞으로 보여줄 다채로운 여정이 기대된다.

 

전시장을 찾은 고교 동문들과 함께.  오른쪽 제일 앞이 박태희 화백이다.
전시장을 찾은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 제일 앞이 박태희 화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