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광복〕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과 임청각
[다시 보는 광복〕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과 임청각
  • 이동백 기자
  • 승인 2019.08.1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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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이 낳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불꽃같은 항일 독립운동
석주 이상룡 선생  임청각 제공
석주 이상룡 선생 임청각 제공

3·1운동 100주년, 광복 74주년을 맞는 8⋅15 광복절 아침, 임청각 후원에 배롱나무꽃이 붉게 피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현들의 민족혼은 아마 배롱나무꽃처럼 붉게 타오르지 않았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 역시 저 꽃처럼 붉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임청각에서 태어난 이상룡 선생은 한말의 의병 활동을 시작으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고 서로군정서 독판(督辦)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한말 당시 여느 선비들처럼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유학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의 침탈로 위기에 처하자, 그 원인을 교육의 부재에 있음을 인식한 선생은 서양학문을 수용하여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러한 즈음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나자, 이상룡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장 권세연과 이강년의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 뒤에 유인식과 김동삼 등과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협동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1909년 봄 의병 활동에 연루되어 잠깐 구속되었으나 석방되고, 그 해 3월에는 애국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1910년 11월 양기탁, 이회영 등 신민회 인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 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을 뜻을 품고, 만주로 옮겨 가 독립운동을 펴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망명을 결심한 선생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처분해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1년 초 집안에서 거느리던 노비를 해방시키고,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1년 4월 초순 가족들이 모두 도착하자, 서간도에 위치한 펑텐성 류허현 삼원보 추가가로 이동하여 신민회 회원 이동녕, 이회영 등과 독립군 기지 개척에 앞장섰다.

1911년 봄 삼원보 다구산에서 민단 성격의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였다.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되었고, 이는 남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학사 지도부와 함께 한인 2세들의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19년 5월에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1,500여 명의 독립군 요원을 배출하였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모두 만주 지역 항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한편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 선생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해 삼도항에서 남만통일회를 개최, 서간도 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이상룡 선생은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도 없고. 내각을 조직할 만한 세력을 모으지도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서간도 반석현 호란하로 돌아온 이상룡 선생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경상북도독립기념관의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석주 선생이 보여주셨던 지행합일의 의지와 포용적 태도, 그리고 변화를 거듭했던 탄력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더구나 선생은 그 길을 혼자 가신 것이 아니라, 만주의 한인 동포들을 아우르며 가셨습니다. 선생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이상룡 선생을 평가했다.

2019년 광복절 아침의 임청각 이동백 기자
2019년 광복절 아침의 임청각       이동백 기자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적 공간이다. 임청각에서 이상룡 선생은 노비를 풀어주고, 독립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1942년에 일제는 임청각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집이라 하여 바로 앞에 중앙선 철길을 놓았고, 그 부속 건물의 상당수를 철거하고 말았다. 이상룡 선생의 독립 정신은 가족에게 이어져 임청각에서 배출한 독립 유공자가 열 명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 명이 독립 유공자로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선생의 부인 김우락 여사와 손부 허은 여사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한편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광복절 아침에 임청각에서 만난 안동문화지킴이의 김호태(59) 대표는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 “일찍이 ‘나라를 잃기는 쉽지만, 나라를 되찾기는 백 배 천 배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지만, 석주 선생은 오로지 민족과 나라를 찾기 위해 재산까지 헌납하고 일제와 싸운 위대한 분이십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에 기록하여 영원토록 민족의 가슴속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훈장이 추서된 임청각의 독립운동가분들도 함께 기려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임청각은 앞으로 7년간(2019~2025년) 280억 원을 들여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정비하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광복절을 맞이하여 안동 예술의전당에 이어 여의도 KBS홀에서 ‘석주 이상룡’ 창작 오페라를 공연한다.

지금 우리는 보수와 진보로 편이 갈려 때 아닌 갈등으로 심한 내홍을 겪고 있다. 이러한 때,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의 책임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침을 귀감으로 삼아 갈등을 넘어 배려와 화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배려와 화합, 이것이 이상룡 선생이 우리에게 지운 엄중한 책무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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