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의 '무릎을 잃어버리다'
엄원태의 '무릎을 잃어버리다'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8.22 17:39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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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8. 22. 집
2019. 08. 22. 집

 

엄원태의 ‘무릎을 잃어버리다’

 

한동안 무릎은 시큰거리고 아파서, 내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아침산에 몇 달 만에 아프지 않게 되자 쉽게 잊혀졌다. 어머니는 모시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하시다. 때로는 잘 삐치고 짜증까지 내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삼시 세끼를 챙겨드려야 마지못한 듯 드신다. 어쩌다 외출이 길어져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그때까지 밥을 굶으며 아주 시위를 한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아픈 무릎이다.

아우는 마흔 넘도록 홀로 대척지인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로 떠돌아다닌다. 아우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와 사랑은 참 각별하시다. 아우는 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시집 『물방울 무덤』 창작과비평 2007. 02. 06.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무릎 연골이 닳아 줄기세포 이식을 해야 한단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의사의 최후통첩이 내려진 모양이다. 그녀의 아픈 무릎에 대해 이야기 들은 지가 벌써 몇 해인가.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막무가내로 말렸었다. 가급적이면 늦출 만큼 늦추라고, 그 방면에 문외한이면서 아는 척했다. 누구한테 들은 경우를 마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처럼 일반화시켜 설득했다. 전적으로 내 말에 움직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수술 않고 잘 버텨온 것이다. 통증을 진통주사로 견딘다고 들었다. 솔직히 그 고통의 무게가 어느 만큼인지 제3자인 나로서는 가늠되지 않지만 아프다.

남편의 전 동료였던 분께서 친구와 비슷한 이유로 수술을 받으셨다. 그분 말씀이 이렇게 시원하고 아무런 문제없을 줄 알았으면 망설이지 말고 진즉 수술할 걸 공연히 겁먹고 미루었다면서 웃으며 말씀하신다. 하긴 같은 약국에서 같은 약을 처방받아도 그 효과에 대해선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다. 당장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들은 그대로 알려주면서 지레 두려워 말고 발달한 의술을 한번 믿어보라고 했다. 피할 수 없으면 부딪혀서 헤쳐 나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기왕 이렇게 된 일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마음 자세가 절실히 필요할 것 같다. 걱정한답시고 어쭙잖게 건네는 훈수가 도리어 상처일 수 있겠구나 싶다. 

한 편의 장掌수필처럼 읽힌다. 내 아픔에 관해서는 민감하고 타인의 아픔엔 둔감할 수밖에 없는 게 인지상정이다. ‘아픈 손가락’이란 말은 들었으나 ‘아픈 무릎’이란 말은 생소하다. 어쨌거나 두 표현이 동일한 상징성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 관심과 염려에서 파생된 사랑의 세부라고 할까. 끈끈한 애정이고 연민이며 측은지심이리라. 부모와 자식 사이이거나 형제지간처럼 핏줄로 연결된 관계라면 갚을 수 없는 영원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겉으로 비춰지는 단순한 조건에서 약자는 강자의 아픈 무릎이다. 각별한 사랑과 염려가 인연의 가치를 더 빛나게 할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아픈 무릎일 수 있으므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