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20)
녹슨 철모 (20)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8.1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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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은 여자가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여자가 있었지만 친척이 아니고 집안에서 가사 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밖에 없어 그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퇴계 선생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도시에서 대대로 살아온 태원으로서는 그런 것들이 다 '실없는 촌놈들의 허세' 라고만 생각하고 양반 운운하면 우습고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양반들은 교육이 중요한지 태원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따뜻한 모정을 느끼기보다는 이건 하고, 저건 하지 말라는 훈육만 받고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긴 그런 덕에 일류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까지 가서 의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원은 항상 정이 그리웠다. 맏이인 그는 항상 외로웠다. 누나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고 살았다.

그의 집에는 장거리 버스도 한 대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차장들이 살고 있었고, 또래의 식모들도 있었다. 그러나 딱히 누가 그러라는 것은 아닌데 분위기가 주인 아들이 고용된 여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이나 그의 부모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또 태원은 부모끼리도 사업 외의 일로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탓에 태원은 혼자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것이 놀이요. 취미가 되어 버렸다. 부모는 사업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또 자신은 형도 누나도 없는 맏이가 되다 보니 누구의 지도나 조언도 없이 아무 책이나 구해지는 대로 마구잡이로 읽었다. 그러게 살다 보니 그의 삶은 점점 현실과는 멀어지게 되고 좋게 말하자면 이상주의로 가는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비현실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책에 나오는 여성, 그리고 그 연애라는 것, 서양 소설의 문물은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많은데도 태원은 그것이 우리 현실에서도 실현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기준이 되니 그의 주변이 다 뭔가 잘못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특히 여자에 있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서울에서 병주를 만난 것만 해도 태원으로서는 아주 특이한 경험에 해당되는 유별난 일이었다.

연대에 볼일이 있어 부대로 온 김에 하루를 천장이 있는 부대 막사에서 잤다. 그 병주가 준, 즉 여자가 준 베개를 베고 오랜만에 천장이 있는 방에 누워 있으니 온갖 감회가 태원의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다음 날 날이 밝아 자세히 보니 병주가 보낸 사루비아 꽃들이 삭막한 2대대 콘세트 막사 주변에 안개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태원은 저 붉은 꽃들은 병주가 내게 보내준 애정의 구름이라고 생각하며 그 붉은 꽃을 하염없이 보고 서 있다. 임진강으로 돌아갔다.

군인이라도 전방에서 근무하는 사람과 후방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모양새가 다르다. 장교들의 경우 전방 장교들은 어딘가 사나이다운 멋이 있고 행동 또한 품위가 있다. 그러나 같은 전투부대라도 군단에만 오면 장교들이 군기가 다 빠져 민간인과 비슷한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사병들의 경우 전방에는 학교를 다니지 않은 무학자도 있고 데모하다 쫓겨온 대학생도 있고 전과자, 농민, 직장인 등 각양 각생의 인총이 모여 살게 된다. 하지만 신통하게도 그들은 날 때부터 전방에 살던 군인이었던 것처럼 모두가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했다. 다 같이 참고, 다 같이 명령에 복종하고 또 멍청한 체하며 산다. 그런데 군단에 와보니 전방대대와는 전혀 달랐다. 좋게 말하면 다 똑똑해 보이고, 나쁘게 보면 인간미가 없이 모두가 하나같이 반질반질 닳은 차돌 같았다. 전방에서는 말로 안 되는 경우에는 공공연하게 두들겨 패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군단에서는 그런 식으로 구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태원은 전방에서 많은 고생을 하였어도 장병들 모두가 형제처럼 함께 굶주리고 함께 웃고 울던 그 생활이 너무 그리웠다. 인정이 그리웠다. 태원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한동안 두려워 혼자 학교를 가지 못하고 엄마와 함께 갔다. 힘들거나 뜻대로 안 되면 곧잘 울곤 했다. 그의 어릴 적 그런 약점이 남아선지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별에 약하고 또한 쉽게 우울해졌다. 그가 군단 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이유 중에는 현재 생활의 고통보다 전방에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가장 힘들게 하였던 것이다.

파주 기지촌에 가을이 왔다. 그해에도 태원의 지병인 가을 우울증은 함께 찾아왔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 발병한 우울증이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를 괴롭혔다. 그 우울증은 기복이 있었다. 어느 해는 굉장히 힘들었지만 바쁘거나 긴장하는 해는 가볍게 넘어가는 병이었다. 그 해에도 ‘가을 병’이 찾아왔다. 이 무렵 있었던 한 사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기억이 더욱 전방시절을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방의 가을은 왔다면 바로 겨울이 되었다. 추위도 매서웠다. 그 추위가 고독과 고통의 수은주가 함께 올라가서 오는 추위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전방의 겨울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어느 추운 날 출근하자 이용웅 상병이 여느 때와 같이 재빨리 우 중위의 야전 상의를 받아 걸었다. 태원은 춥든지 덥든지 일단 실내에서는 반드시 모자를 벗고 상의를 벗는다. 그것이 육군 규정이기 때문에 그는 규정을 따르는 것이었다. 퇴근 무렵 평소에는 이 상병이 득달같이 달려와 상의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 상병이 야전 상의는 주지 않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크게 바쁘신 일은 없죠?"

"응. 왜 누가 진료라도 받으러 온대?” 

무슨 일인가 하면서 되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잠깐만 좀 계셔주십시오.” 

이 상병은 무척 바쁜지 이 말만 하고는 냉큼 밖으로 달려 나갔다. 퇴근은 해야겠는데 우선 상의가 없으니 추워서 문을 나서기도 힘들고 또 이 상병이 기다리라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질 급한 우 중위로서는 내심 약간 조급증이 났지만 그냥 참고 앉아 있었다. 약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 상병이 헐떡거리며 내무반을 뛰어 들어오는데 그의 팔에는 우 중위의 상의가 들려 있었다.

"야, 이 상병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좀 신경질이 나서 짜증스럽게 태원이 물었다.

“오늘 아침에 빨았어요.” 

이 상병이 세탁된 상의를 우 중위에게 건네주었다. 야전 상의는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있었다. 우 중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여 다시 한번 들여다 보았지만 자신의 야전 상의가 틀림없었다. 아침에 빤 그 두터운 야전상의가 어떻게 짧은 겨울 하루 해에 다 마를 수가 있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이루어져 있었다. 우 중위는 깨끗이 세탁된 야전 상의를 입고 퇴근하였다.

항상 책만 읽던 이용웅, 부자와 권력자를 미워한다던 이 상병, 임진강 시절 그 이 상병이 이제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날 면담이 있은 뒤 이 상병은 태원을 무척 따르고 좋아하였다. 영외에 있는 우 중위의 숙소에 나가 청소도 해주고 전투복도 빨아주었다. 처음 우 중위는 이런 대접이 어색하고 불편해서 극구 말렸으나 그는 제 고집대로 행동하였다. 그날 아침도 이용웅은 우 중위의 야전 상의를 받아서 바로 얼음 깬 찬물에 빨았다. 겨울 빨래라 손도 시리고 때도 잘 빠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더 힘든 일은 빨고 난 뒤 물에 젖은 상의를 말리는 일이었다.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도 그런 두터운 옷은 하루 만에 다 마르지 않는다. 이 상병은 일단 물에 젖은 상의를 담요 사이에 끼워 지근지근 밟아 대충 물기를 제거하였다. 그 후 이 내무반 저 내무반 난로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그 옷을 말린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우 중위의 퇴근 무렵이 되었고 다림질을 하여 겨우 퇴근 전에 빨래를 완성한 것이다. 우 중위는 한 번도 이 상병에게 고맙다거나 칭찬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그날도 그랬고 다음에도 그랬다. 이 친구가 나의 계급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고 나와의 우정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기가 싫었다. 임진강에서 석 달간 숙영 생활을 하며 서로가 벌거벗은 상대를 보고 이해하고 친해진 결과로 나온 행동이었다. 태원도 앞으로 그를 도울 일이 있으면 어떤 경우도 돕겠다는 생각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이런 깊고 따뜻한 남자들의 우정이 군단 의무실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곳대로 또 다른 남자들의 우정이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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