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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농사의 변화
icon 유병길
icon 2020-09-04 09:19:57  |  icon 조회: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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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주의 들판에는 일품벼가 이삭을 패고 수정을 하고 있다. 오십 여일 계속된 장마를 힘들게 이기며 유수가 형성되고 가끔 보이는 햇볕의 도움으로 양분을 축적하여 어린 이삭을 키웠고, 장마가 끝나고 강렬한 빛과 찜통더위의 힘을 받아 충실한 이삭을 피었다.
이제 앞으로 사십 여일 날씨가 좋고 물이 있고, 병충해만 없으면 올해 이곳의 벼농사는 대풍작이 될 것 같다.
오 육십 대 이하는 과수나 비닐하우스 등 소득작목을 재배하고, 벼농사를 짓는 분들은 연세가 많아 칠십 대는 젊은 층에 속한다.
부의 상징이었던 쌀의 가치가 옛날보다 많이 떨어져서 대풍이 온다고 하여도 기쁘지도 않고 그냥 덤덤하다. 그러나 장마로 제방이 터져 벼가 유실되거나 흙에 매몰되었거나 침수가 되어 이삭이 썩는 피해를 본 지역의 농민들은 실망이 대단할 것이다.
쌀 한 톨을 생산하는데 옛날에는 백 수십 번의 손길이 간다고 하였으나. 요즘은 기계화가 되어 수십 번으로 줄었다.

1. 물못자리가 상자못자리로 변하였다.
옛날에는 물못자리를 만들어 45일 정도 모를 키워서 모내기를 하였으나, 1972년 통일벼가 처음 보급되면서 모내기를 일찍 하기 위하여, 묘판 위에 대나무 골주를 꼽고 비닐을 씌워 보온절충못자리를 하였다.
1979년 시군단위에 기계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6030cm 상자에 흙을 넣고 물을 뿌리고, 싹을 틔운 볍씨를 뿌리고 흙을 덮어 상자를 방안에 10~15단 쌓아 놓고 난로를 피워 싹을 출아 시켜 보온절충못자리 속에 상자를 놓고 30일 중모를 키웠다. 비닐하우스가 많이 공급되면서 비닐하우스 속에서 출아를 시켰다.
노동력을 절감하기 위하여 10일 정도 모를 키우는 어린모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모 뿌리가 빨리 엉켜 매트가 형성되도록 상자 바닥에 비닐을 깔고 흙을 넣어 볍씨를 파종하였다. 싹이 출아 된 상자를 마당에, 비닐하우스 바닥, 선반에 놓고 10여 일 물을 뿌려주며 묘를 키웠다. 물 논에 들어가지 않고 쉽게 모를 키워 노동력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상자에 넣을 흙(상토)을 준비하는데 힘들었으나, 요즘은 포대에 담긴 상토를 벼재배 면적에 따라 무상공급하여 편리하다.
최근에는 모를 전문적으로 키워서 판매하는 지역의 육묘장에서 모 상자를 사다가 모내기를 하는 농업인도 늘고 있다.

2. 손 모내기가 기계 모내기로 변하였다.
소로 논을 갈고 쓰레질을 하여 모내기를 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 경운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논을 갈고 로터리를 치고 모내기를 하고 있다.
집 집마다 모내기 날자를 정하여 품앗이로 돌아가며 모내기를 하였다.
컴컴한 새벽에 십여 명에서 이십여 명이 나와서 모를 찌고 짚으로 묶으면 주인은 헌 가마니에 새끼를 묶어 모춤을 싣고 논바닥에 고루 운반하였다. 모를 다 찌면 양팔 간격으로 옆으로 늘어서서 모를 심었다. 손 모내기는 모를 잘 심는 사람은 150평 정도를 심었다. 주로 벌모를 심다가 1960년대 다수확 농사를 짓기 위하여 농진청에서 줄모를 심기를 권장하였다.
배가 고픈 시기라 부모가 모내기하려고 간 집 앞에서 아이들이 기다리다가 아침 점심밥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논으로 나갈 때 아이들이 따라가서 밥을 먹었다. 모를 심는 일꾼보다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때 들판은 어른들 웃음소리, “야” “야” 못줄 넘기는 소리, 아이들이 떠들고 우는 소리, 큰 소와 송아지 소리로 많이 시끄러웠다.
하늘에서 제때 비가 내려주면 이십여 일이면 모내기가 끝이 났으나, 가뭄이 계속되는 해에는 오래 걸렸다. 칠월 하순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못 심은 논은 골을 타고 조를 파종하였다.

1979년에 벼농사 기계화 사업으로 시작한 기계 모내기 보급은 어려움도 많았다. 시군단위 1개소에 시범단지를 만들어 기계 모내기를 보급하는 전초기지를 만들어 시범을 보였다. 처음에는 이앙기로 모를 심으면 수량이 떨어 진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존의 농법을 새 농법으로 바꾼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다. 자기는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 보고 손해가 없으면 따라하는 실증이었다. 손 모내기는 45일 키운 모를 심고 돌아서면 푸르게 논이 어울렸는데, 상자에 30일 키운 작은 모를 심고 나면 논이 다 빈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논이 다 빈다고 많이 싫어하였다. 일부 극성 적인 논 주인은 놀 골에 상자 모를 찢어서 손으로 다시 심었다.
기계 모내기는 이앙기 운전자와 모 상자를 들어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삼십 마지기(6,000평)를 하루에 심을 수 있으니 쉬웠고 들판이 조용하였다. 모내기 후 한 달이 지나자 새끼치기를 많이 하여 논이 어울렸다.
가을에 시범단지에서 많은 인원을 모아 기계 모내기 수량 비교평가회를 하였다. 벼를 한 평씩 베어 탈곡하여 수량조사를 하였으나, 수량 차이가 없었다. 논 전체 벼를 베고 타작을 하였을 때 작년의 수량과 차이가 없다는 말을 듣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노동력이 적게 들고 쉽게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앙기를 구입하면서 기계 모내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후반 거의 모든 논을 이앙기로 모를 심을 때 사람이 적어 들판은 조용하였고 이앙기 몇 대만이 들판을 누볐다. 새로운 농법인 기계 모내기를 처음 보급할 때 농촌지도사들의 고충은 통일벼 재배면적을 확대할 때만큼 힘이 들었다.

3. 인력 잡초방제가 제초제에 의한 방제로
인력으로 잡초를 방제할 때 벼농사는 피 잡초와의 전쟁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못자리에서 자라는 피와 잡초는 일일이 손으로 다 뽑았다. 모와 같이 자라는 피는 구분하기가 힘들 만큼 비슷하다. 그때는 논에 거머리가 많아 조금만 있으면 양쪽 다리에 까맣게 붙었고 때 내면 피가흘렸다. 어린 시절에는 다리에 피 나는 게 피 뽑는 것으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물못자리에서 두세 번씩 피를 뽑았다. 모판에서 피를 덜 뽑고 모을 심었을 때 넓은 면적에서 피를 뽑으려면 힘과 노동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묘판에서 피를 잘 뽑고 모내기를 하였다.
모를 심고 초벌 논매기는 모낸 후 20일경에, 두벌 논매기는 초벌 후 10일경에 품앗이로 10여 명이 옆으로 늘어서서 앞으로 나가며 호미로 풀을 뽑았다.
두벌 논매기 때는 벼 잎이 억세어 눈도 찔리고 팔다리에 상처도 입혔다.
이때도 배가 고픈 아이들은 아버지, 할아버지가 논을 매주려고 간 집 앞에 서성이다가, 아주머니가 머리에 이고 가는 점심밥 광주리를 따라 갔다.
그때 얻어먹는 밥 한 그릇, 노릇노릇 구운 고등어 한 토막을 뼈 체로 씹어 먹던 그 맛! 행복의 순간이었다.
줄 모내기가 시작되면서 논매는 기계가 보급되어 놀골에 기계를 놓고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죽죽 밀고 나가면, 흙을 파면서 풀까지 뽑아주었다. 호미로 풀을 뽑을 때보다는 쉬워졌으나, 벼 포기 옆의 피는 이삭이 팰 때 뽑아야만 했다.

1970년대 초반에 제초제에 의한 잡초방제가 처음 시작되었다.
논 제초제 탁크 입제가 판매되어 모내기를 하고 10여일 경 300평당 탁크 1봉을 고르게 뿌렸다. 탁크는 가는 국수 부스러기 같았는데, 논에 뿌리면 물속에서 하얗게 보였고 물에 다 녹으면 논 표면에 제초제 막이 생겼다. 피, 방동사니 같은 일년생 잡초가 막을 뚫고 올라오면 광합성작용을 할 수 없어 죽게 되었으나, 올미 벗풀 올방게 가래 같은 다년생 잡초는 효과가 없었다.
몇 년 후에는 다년생 잡초를 죽일 수 있는 제초제가 개발되면서 올미 벗풀 올방개 가래 같은 다년생 잡초를 죽일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일년생 잡초를 잡는 초기제초제를 논 쓰레질할 때 뿌리고, 모를 심은 후 15일경에는 다년생 잡초를 잡는 중기 제초제를 한 번 더 뿌리는 제초제체계처리로 논을 매지 않고 벼농사를 쉽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초제를 잘못 사용하여 한해 농사를 망치는 사례도 많았다.

4. 수동식분무기 병해충 방제가 항공방제로
1950~60년대 일반 벼는 도열병에 약하여 이삭이 익지 못하고 그냥 말라버려 이삭도열병의 피해가 많았다. 농약을 뿌리고 싶어도 농약 구입도 힘들었고 분무기도 어깨에 메는 수동식, 지랫대식 뿐이라 방제가 어려웠다. 1972년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도열병이 걸리지 않아 좋아들 했다.
1975년 추석 때 전국적으로 벼멸구가 발생하였다. 논바닥에 둥근 원을 그리며 벼 포기 전체가 말라서 논 전체가 마르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때는 벼멸구 전용 약제가 없어 살충제를 뿌려도 효과가 없었다.
몇 년 후 벼멸구 전용 약제인 밧사가 공급되면서 한시름 놓았으나, 방제적기를 판단하기 위한 벼멸구 정밀 예찰을 하였고, 공동 방제를 하였다. 옛말에 “몰구(벼멸구)는 볏단에 달라 들어도 피해를 준다.”는 말이 있었다.

고성능 분무기를 경운기에 연결하여 병해충방제를 하였으나, 일시에 많은 면적의 공동방제는 한계가 있었다.
1980년대부터 8월 상순경에 벼멸구와 이삭도열병 예방을 위하여 읍면 단위 넓은 들에는 항공방제를 하였다. 새벽에 군청 옥상에서 헬기 조종사 옆자리에 앉아 항공방제할 곳을 안내를 한 일도 있었다.

1988년 경남 하동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벼물바구미는 남미지역에서 싣고 오는 원목에 묻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 발생하였다. 우리는 모심은 일주일 경 제초제와 같이 카보입제를 살포하여 이화명충을 방제하기 때문에 큰 피해가 없었다.


5. 낫 쟁기 등 농기구가 경운기 이앙기 트렉터 콤바인으로
옛날 벼농사를 지을 때 쓰는 농기구는 풀을 메는 호미, 논을 경운하는 쟁기, 벼를 베는 낫과 운반하는 도구는 지개, 소 질매와 걸채, 달구지, 리어카 등 이였다.
1960년대 이후 정부에서는 선진국과 같이 노동력과 생산비를 적게 들이는 기계화 영농을 위하여 대대적인 경지정리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저수지와 다목적 댐을 막아 적기에 모내기를 할 수 있도록 기반 정비에 최선을 다하였다.
경운기가 공급되면서 소 대신 논 밭갈이를 하고, 물건을 운반하고, 농약을 살포하고, 물을 퍼고, 탈곡을 하는 등 모든 일을 하였다. 경운기가 소 대신 많은 일을 하면서, 집 집마다 키우던 소가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트랙터가 공급되면서 경운기가 하던 논갈이와 쓰레질은 힘이 센 트랙터 몫이 되었다.
이앙기 뒤를 힘들게 따라다니며 모를 심던 보행용 이앙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감탄사가 대단하였는데, 이앙기를 타고 운전하며 모를 심는 승용이앙기가 공급되면서 쉽게 모내기를 할 수가 있어 힘들었던 손모내기를 이앙기가 대신 모내기를 하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온 들판에서 사람들이 낫으로 베던 벼를 바인더가 쉽게 베어주더니, 1980년대 후반에는 콤바인이 공급되면서 벼 베기와 탈곡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 벼농사 기계화 시대가 열렸다. 이앙기와 트렉터, 콤바인 공급은 쉽게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계화 영농에 큰 공헌을 하였다.
콤바인은 물벼를 수확하므로 건조에 애로가 있었으나 곡물건조기가 공급되었고, 1990년대 초에는 시군마다 미곡 종합처리장이 설치되어 물벼를 수매하여 건조, 저장, 도정, 포장작업을 일괄처리하여 편리한 쌀농사 시대를 열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범용콤바인 공급으로 30kg의 포대에 담던 벼를 500kg, 1,000kg 포대에 담게 되어 노동력을 줄여 더 많은 면적의 벼를 탈곡 할 수 있게 되었다.

벼농사의 기계화율은 1998년도 97%에서 2000년대에는 거의 100% 이루어졌다. 벼농사 기계화와 잡초 약 체계처리로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었다. 300평 벼농사 노동시간은 1960년대 127시간이었으나 2010년에는 29시간으로 줄어든 엄청난 변화가 되었다.
옛날 방식으로 벼농사를 짓는다면, 고령화된 지금의 농촌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기계화 위탁영농이 정착되었기에 젊은 농업인이 대면적의 벼농사를 짓고 있어 우리의 쌀을 먹고 있다.
2020-09-04 09: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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