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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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곶감의 명성
icon 유병길
icon 2019-12-03 14:53:37  |  icon 조회: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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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에서 장례식을 보고 저승사자를 따라 다시 극락으로 돌아 왔을 때 집터와 밭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이 붉게 익었다. 부모님과 장인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인부들과 같이 곶감을 말릴 감 타래를 크게 지었다. 큰 장모님이

“김 서방, 큰 처남은 잘 살고 있는가? 그 애도 이제 노인이 되었겠네.”

“네, 저와 동갑이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장모님, 이곳 저승에서는 이승을 다 내려다보시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 아시지요?”

“아니야. 이승에서 저승을 못 보듯, 이곳 저승에서도 이승을 볼 수 없다네.”

저승에 계시는 조상님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다 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못 보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염라대왕님이 좋아하시는 곶감을 만들기 위하여 감을 따고 정성들여 깎았다. 꼭지에 행거를 끼워 감 타래에 달고 유황을 피우고 비닐을 걷고 환기를 시켰다. 이튿날 감 타래에 갔는데 45일 정도 마른 반 건시가 되어있어서 깜짝 놀랐다. 덜 마른 곶감을 예쁘게 손질하여 한 접시 담아 저승사자 편으로 염라대왕님께 보냈다.

남은 곶감 손질하여 냉동고에 넣고 있는데, 저승사자가 달려왔다. 염라대왕님이 찾는다하여 앞에 가서 엎드렸다.

“정말 최고로 맛있는 곶감을 먹었다. 호랑이도 겁을 낸다는 맛있는 곶감을 직접 만들어 주어 너무 고맙다. 너의 임무는 여기서 끝이 났다. 이곳에 남아서 곶감을 만들고 싶으냐? 아니면 가족들이 있는 이승에 가서 곶감을 만들고 싶으나? 네가 원하는 데로 해 주겠다.”

“저를 이승으로 보내 주시면 가족들과 같이 남은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명이 다하는 날 다시 와서 맛있는 곶감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이곳의 곶감 만드는 일은 네 애비와 장인한테 맡기도록 하고, 이승으로 보내주겠다.”

“네, 감사합니다.”

큰절을 하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 흰 백마가 버티고 서있다.

“이 백마를 타고 가거라.”

말을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어서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조심스럽게 백마에 올라 고삐를 잡는 순간 염라대왕이 채찍으로 백마를 쳤다. ‘휘잉’하며 백마가 튀어 올라 떨어지면서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여보!” “아버지!” “김 서방!” 외치는 소리가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였다.

“여보,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서 당신을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어. 살아주어서 감사해요.”

“진짜 내가 살아있는 거야? 장례를 치르고 49제까지 지냈는데, 살아있다니 실감이 안 나네.”

“여보, 무슨 소리야?”

“저승사자를 따라 저승에 갔었어. 염라대왕님이 맛있는 상주 곶감을 먹고 싶다며 아버지 어머니, 장인, 큰 장모님과 곶감을 만들라고 하셨어.”

“의식이 없는 5일 동안 별별 일이 다 있었네. 여보, 살아나서 고마워.”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족들과 친척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모두가 내 말을 믿지 않았는데 옷을 갈아입히던 아내가 염할 때 묶였던 곳에 난 자국을 보았다. 다리와 팔의 환자복을 걷어 올리며

“오빠, 여기 봐요. 발목, 무릎, 허벅지, 팔에 난 이 자국은 염할 때 묶였던 자국 같아요.”

“정말 신기하네. 죽었다가 살아왔단 말인가.”

내가 깨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담당의사가 왔다.

“환자분이 깨어나지 않아 모두가 애를 태웠는데 일어나서 고마워요. 큰 아들이 마지막 부탁이라며 수술하자고 매달려서 수술을 하였어요. 가슴을 열고 보니 검사 결과만큼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수술을 잘 하였어요. 며칠 경과를 보고 좋아지면 다음 주에는 퇴원하여도 될 것 같아요. 식사도 많이 하고 빨리 회복하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의사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눈을 감는 순간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님을 위하여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님과 같이 곶감을 만들어 드렸던 일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빛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가 내 손을 잡고 당겨서 일어서는데, 내 몸이 깃털같이 가벼운 예감이 들었다.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내 몸은 그 자리에 누워있다. 내 몸을 흔들며 “여보~” “아버지~”라고 큰소리로 부르며 통곡을 한다. 순간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저승사자의 손을 뿌리치고 아내한테 달려갔으나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너무 미안하여 아내의 손을 잡았다. 두 아들과 두 딸, 며느리 사위들, 손을 잡고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 말을 하고 돌아서야 했다.

저승사자와 같이 큰 궁궐 앞에 섰는데 칼을 찬 수문장이 검열하며 나를 보더니

“너는 아직 올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왔느냐?”

내가 의아해하자 저승사자가 옆에 가서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갔다. 열두 대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저승사자가 같은 말을 하였다. 큰문을 여는 순간 밝은 빛이 나는 곳을 바라보니 광채가 나는 흰 도포를 입고 수염이 흰 염라대왕이 앉아있어 엎드렸다.

“네가 상주 곶감을 잘 만든다는 명성을 가진 김 아무개야?”

“네 그렇습니다.”

“내가 곶감을 너무 좋아하여 너를 데려 왔으니, 최상품의 곶감을 만들어 일 년 내내 계속 먹을 수 있게 하겠느냐?”

“네, 하겠습니다.”

“너를 극락으로 보낼 터이니 그곳에 있는 네 애비어미와 장인장모와 같이 네 기술을 발휘하여 나를 기쁘게 하여라.”

“대왕님의 분부를 받들어 최고의 곶감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3일 휴가를 줄 터이니 잠시 극락에서 아버지와 장인께 인사를 하고 이승에서 슬퍼하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오너라.”

“네”

저승사자와 같이 문을 열고 밖에 나가 이십여 년 전에 하늘나라 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넓고 넓은 저승에 내가 갔을 때 먼저가신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까 늘 걱정을 하였는데, 너무나 반가워 큰절을 하였다.

“장인과 큰 장모님께 인사를 올려라”

옆을 보니 30대 청년 아저씨와 20대의 젊은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다. 의아해하는 나를 본 아버지가

“이곳에서는 나이를 먹지 않고 늙지 않으니 돌아가셨을 때 그 모습이란다.” 큰절을 올렸다. 처음 보는 장인 장모님이 내 손을 잡고

“아이들 키우고 사느라 고생을 많이 하였구나. 이곳까지 알려진 명성 때문에 일찍 온 것 같으니 열심히 곶감을 만들어 보자. 김 서방 장모는 잘 있는가?”

“건강이 안 좋아서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그래, 혼자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만 하였는데....”

“큰 처남, 작은 처남, 처제도 열심히 잘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가? 늘 궁금하였는데, 소식 잘 들었네.”

아버지와 장인이 빨리 이승에 갔다 오라고 하셨다. 인사를 하고 저승사자와 같이 돌아섰는데 장례식장이다. 한창 염을 하고 있다. 명주로 만든 수의를 입히고 일곱 곳을 묶는다. 입관을 하는데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과 누님과 매형이 장례준비를 하고 있다. 친척과 많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이제 고생 끝나고 편히 살만한데, 일찍 갔다”고 아쉬워한다.

첫 아들을 낳아 부모님이 즐거워하시던 모습... 아들 딸 사남매를 낳고 어려웠지만, 행복하였던 젊은 시절. 아내와 같이 품질 좋은 상주곶감을 만들기 위하여 함께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릴 때 학교 갔다 오면 배가 고파 곶감 타래에서 덜 말라 말랑말랑한 곶감을 몰래 싸리꼬챙이에서 빼먹으면 많이 달고 맛이 있었다. 말라서 단단한 곶감보다 이런 곶감을 팔면 사서 먹는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라는 꿈같은 상상을 하였다.

1970년대 초 결혼을 하고 이듬해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와 밝은 세상이 너무나 좋았다.

몇 년 후 텔레비전을 사고 냉장고를 사면서 어릴 때부터 상상하였던 덜 마른 곶감을 만들기 위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싸리나무에 끼워 말린 곶감은 구멍이 생기고 구멍에 곰팡이가 생겨 나쁘다는 말이 들렸다. 싸리나무에 끼우지 않고 노끈을 감꼭지에 묶어 처마 밑에 매달아 말리는 방법에 힌트를 얻어 곶감을 말리자 구멍이 없어 보기가 좋았고 곰팡이도 없었다. 노끈으로 묶어 40일 정도 말리던 곶감을 냉장고 냉동실과 냉장실에 50개씩 보관을 하였다. 냉장실 곶감은 곰팡이가 피었는데, 냉동실에는 30일, 90일을 보관하여도 얼지 않고 말랑말랑하고 단맛도 처음과 같았다. 홍시 속에는 수분이 있어 영하로 떨어지면 얼지만, 다 말라서 수분이 없고 당도가 높은 곶감은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져도 얼지 않는 것을 알았다.

덜 말린(반 건시) 새로운 상주 곶감을 생산하여 판매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빚 때문에 반대하는 아내를 설득하고 융자를 얻어 앞밭에 대형 비닐하우스를 지어 차광 망을 덮고, 그 안에 튼튼하게 감 타래 시설을 하였다. 곶감을 보관할 냉동고는 기존 창고 안에 만들어 돈을 줄일 수 있었다.

곶감 농사도 일반 농사와 같이 기상이 좋아야 한다. 좋은 곶감이 되려면 깎은 부분이 빨리 말라야 속이 홍시가 되어도 처지지 않고 서서히 속의 수분이 마르면서 굳어서 달고 맛있는 곶감이 된다.

첫해에는 우리 감 한 동을 깎아 노끈으로 묶어 감 타래에 걸었다. 밑에 유황을 피우면 곶감 껍질이 빠르게 마른다는 이야기만 듣고 밀봉상태에서 유향을 30분, 1시간 피웠다가 환기해보고, 두 시간, 세 시간 정도 피워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험을 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감을 깎아서 말린 40일부터 5일 간격으로 몇 접씩 냉동고에 보관하면서 단맛 검정을 한 결과 45일 정도 된 곶감이 말랑말랑하면서 단맛이 매우 높아 반응이 아주 좋았다. 45~50일 정도 마른 붉은 선홍빛을 띠는 곶감을 냉동고에 보관하면서 곶감을 크기별로 손질하고 ‘상주 곶감’ 상표를 넣어 제작한 종이 상자와 오동나무상자에 포장하여 판매를 하였다. 곶감을 산 일부의 사람들이 냉동실에 보관하지 않고 밖에 두었다가 곰팡이가 피고 썩어서 버리는 사례가 있어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때부터 판매할 때는 반드시 냉동실에 보관하도록 홍보하였다. 덜 마른 곶감은 달고 맛이 좋아 주문이 많았다. 대대로 내려오든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어렵고 위험부담이 많았지만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듬해 곶감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겨울철에 노약자들의 감나무를 밭떼기로 샀다. 곶감을 깎는 기계도 여러 종류가 개발되고 판매가 시작되었다. 우리 감과 인근 지역에서 산 감나무 밭의 감을 따서 저온 창고에 보관하며 기계로 감을 깎아주는 아주머니들을 아침저녁 승합차로 출퇴근시키며 스무 동을 깎아 감꼭지에 행거를 끼워 감 타래에 곶감을 걸어 말렸다. 기계로 감을 잘 깎는 최고 기술자는 하루 8시간에 7,000개를 깎고, 보통 기술자는 5,000개 정도 깎았다. 작년보다 열 배의 곶감을 생산하고 보니 판매할 곳이 걱정이 되었다. 감을 깎아 말린 순서로 냉동고에 보관하면서 크기별로 상자에 포장 유통업체와 백화점에 판매하였다. 인근지역 공장에도 납품 하면서 다 팔게 되어 돈을 벌었다.

덜 마른 상주 곶감의 명성이 대단하여 5년째는 곶감 생산량이 백여 동이 넘었고, 곶감 품질과 상품성이 우수하여 가문의 영광인 ‘상주 곶감의 명인’이 되었다. 곶감 작목반에서 교육이 있을 때마다 강의를 하면서 나의 체험담을 알려 주었다. 이때 상주 곶감의 명성이 염라대왕님께 알려진 것 같았다.

농촌에서 쌀농사 밭농사로는 엄두도 못 냈을 대학공부, 덜 마른 곶감을 생산하면서 아들 딸 사남매를 대학공부를 시키고 다 결혼을 시켰다.

2019-12-03 14:53:37
59.23.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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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날 2019-12-04 08:33:56
한평의 단편글 잘보고
곶감이 익어가는철에
기쁘게 흘러가는 세월
더욱정감이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