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부르는 노래
icon 김채영 기자
icon 2019-06-24 15:24:17  |  icon 조회: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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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부르는 노래

 

생각과 생각 사이로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느닷없이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궁금했다. 컴퓨터 앞에 죽치고 있는 남편을 일으켜 세웠다. 아내의 요구가 너무 뜬금없다 싶었는지 싫다 좋다 말도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핑계가 되지 못할 게다. 등산이 취미여서 유학산, 황학산을 몇 차례나 오르내렸다. 도개온천은 셀 수 없을 만큼 드나들었다. 그렇게 오갈 때마다 우뚝 솟은 기념탑이 먼발치로 보였다. 그런데도 마당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설 생각은 왜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즐비한 병기들 앞에 서자 압도당한 느낌이다. 덕분에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는 자각에 숙연함마저 든다. 그때의 상흔을 똑똑히 보라는 것인지 머리를 곧추세운 직사포와 곡사포가 잔디밭 위에서 대기상태다. 이름표를 붙인 여러 대의 전차는 여차하면 둔탁한 바퀴를 굴릴 것만 같다. 말로만 듣던 장갑차가 신기하여 어린애마냥 보고 섰노라니 귀가 가렵다. 무기들이 할 말 있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기선을 제압하듯 내가 먼저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저들에게 입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곡진한 이야기가 풀려나올까. 외따로 있는 비행기는 금방이라도 이륙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윽고 기념관 안이다. 벽에 붙은 사진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마련해준 다부동전투를 눈으로 읽는다. 부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부축하고 걷는 사진 속의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많이 지쳐 보인다. 저 장병들은 나이가 몇일까, 생각하니 내 아들인 양 목이 멘다. 328고지, 839고지, 왜관철교, 융단폭격, 처절하고 참혹한 흔적들이 생생하다. 유리 상자 안에 보관된 물품들로 시선을 옮긴다. 찌그러진 철모와 수류탄, 닳고 닳아 밑창만 겨우 남아서 신발임을 증명하는 전투화, 녹슬고 구멍이 숭숭 뚫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전투식량 캔…. 숨 막히도록 슬프고 아픈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려니 현기증이 난다. 처참해도 너무 처참하여 사진 찍기조차 미안하다. 옅은 한숨이 새어나오고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맞은 편 유학산의 신록이 여름빛을 자랑하듯 눈이 부시다. 미세먼지 없는 하늘엔 송이구름이 한가롭다. ‘구국경찰충혼비’를 읽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사진 한번만 좀 찍어주셔요.” 서울 말씨를 사용하는 남자분이 다가왔다. 남편이 카메라를 받아들자 네 가족이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92세의 할아버지가 참전용사시란다. 서울에서 스물두 살에 학도병으로 차출됐는데 167명 부대원 중에서 겨우 16명만 살아남았다고, 고백하듯 쓸쓸히 들려주신다. 색안경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빼곡한 명단 속에서 본인 이름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는다. 아마 한두 번 찾아온 게 아닌 모양이다. 목숨이 경각에 붙은 전쟁을 치른 아흔 줄의 노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해 보인다. 그나마도 내 마음이 편하고 감사하다. 6.25의 산증인을 만나려고 불현듯 다부동으로 발길이 이끌렸나 싶다.

휴일 저녁이면 ‘도전 골든벨’이란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고등학생들의 지식과 상식, 끼를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방송의 순기능이랄까. 한 수 배우는 것은 덤이다. 6.25가 무슨 요일에 일어났는지 묻는 문제가 나왔다. 학생들이 쓴 답은 일요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제각각이었다. 세대 차이라 해야 하나. 6.25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희석되었다는 증거이리라. 6.25발발 7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청소년들이 기억 못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란 생각도 든다. 게다가 평화통일 운운하며 북에다 귤을 보내고 쌀을 부치는 현실 아닌가. 어쨌거나 화해 분위기로 흐르는 건 반길 일이다. 이런 터에 요일을 못 맞힌 게 무슨 대수이랴. 세상이 많이 바뀌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잊으면 안 되는데’란 말꼬리가 혀끝에 달라붙는다.

막내고모는 1950년 음력 2월에 태어났다. 백일도 안 돼서 전쟁이 터진 거다. 더 깊은 산골로 피난을 갔는데 갓난쟁이가 없더란다. 아기라고 업고 온 게 둘둘 말은 베개였단다. 하늘을 찢을 듯이 고함치던 비행기가 잠잠해진 틈을 타 집에 돌아왔더니 눈물을 머금은 채 잠들어 있더라했다. 나는 고모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덕분이랄까. 전쟁의 참상에 대해 몸소 겪은 특별한 사연이 없다. 기억나는 거라곤 초등학교 시절 6월 25일이 되면 기념식을 했다는 것과 목청껏 ‘6.25노래’를 불렀다는 정도다. 요즘도 기념식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다만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불러본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세월이 얼만데 가사가 술술 나온다. 기억이란 참으로 위대하다.

 

2019-06-24 15: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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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태 2019-06-27 17:50:58
주적이 북한임을 각인한 채
국방의 의무를 다 한
예비역 병장은
허물어지는 안보가
장마철 흙더미처럼 느껴집니다.

안보가 평화입니다.

무철 2019-06-26 07:19:52
오래전 유학산 쉰질바위 밑 도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역사의 현장을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장인어른이 6.25 참전용사로 대전현충원에 계시기에 더욱 가슴에 와 닿게 잘 읽었습니다.

호박넝쿨 2019-06-25 19:52:07
역시 능숙하신 글재주에 놀라웠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될 뼈아픈 역사 앞에서
많은것을 느끼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SM Lee 2019-06-25 19:15:57
민족 최대의 비극을 우리는 잊어서 안 되겠습니다. 6.25 노래가 이 비극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머리 숙여 묵념을 합니다.